[스크랩] 입술로 고백하는 믿음
입술로 고백하는 믿음
로마서 10:8-13
2008.6.15(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향상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을 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고백하는 신앙이 되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크리스찬이지만 가정이나 직장에서는 크리스찬이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의 신앙이 뒤로 숨는듯한 느낌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진보되고 향상되려면 자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고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도바울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고도 구원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인줄 알면서도 그 당시 사회가 예수님을 거절했기에 자신의 신앙으로 고백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유대인들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아픈 마음으로 증거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나, 그것을 자신들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켰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에 이르기를 힘써야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자신들의 의를 나타내는 도구화시킴으로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 결과를 가져오고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사실과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믿는 신앙 고백이 있어야합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위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1.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름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8-10)
말씀이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있으면서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 유대인들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이제 어떻게 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고자합니다. 바울은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신명기 30:14)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신명기의 말씀대로 그들의 입과 마음에 두어 율법을 암송하며 묵상하였던 것입니다(시 1:2). 여기서 ‘말씀이 가깝다’는 것은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마음에 선물로서 ‘그리스도의 영’이 와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어 오셨으니 말씀이 가까운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율법은 상대적 위치인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바울은 신명기를 인용하여 말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입과 마음에 있다는 표현으로 하늘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려가는 불가능성과 대조하면서 구원받는 것이 매우 쉬운 일이 되었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밝히 드러냅니다.
바울은 신명기에서 말하고 있는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말씀이 바로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 말씀으로서 사도들이 가르치고 설교하는 복음의 말씀을 뜻합니다. 전파된 말씀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은혜의 말씀으로 구약에 계시된 약속의 말씀, 즉 믿음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말씀’은 복음의 내용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임을 뜻합니다. 바울이 이처럼 신명기 30:14에 나오는 '말씀'을 칭의와 같게 본 것은 그리스도가 그 말씀의 실체이며 실제적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바울은 구원을 얻는 길에 대해서 선포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구원을 얻는 길은 먼저 입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시인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마음에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 있을 때 그 말씀이 그 마음에 있듯이 이제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면 그리스도가 마음에 있을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말은 '예수는 주이시다'고 시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 '주'('퀴리오스')라는 말은 헬라 세계에 있어서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나 노예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호칭이었습니다. 또한 신비종교의 신들이었던 이시스(Isis)나 오시리스(Osiris)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통치자에게 이 명칭을 붙였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칭호 '야웨'는 칠십인역에서 항상 '퀴리오스'로 번역했습니다. 즉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초대 교회에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가 주’라는 고백은 교회 최초의 신앙 고백의 형태로서(행 2:36; 고전 12:3) 예수의 주권(lordship)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에는 경배의 대상이며 승천하신 구주의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또한 마음에 믿어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 예수님을 주로 시인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단지 실패로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가 되신 것입니다. '살리신'은 '일으키다'라는 말로서 이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뜻입니다(고전 15:2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은 성도들로 하여금 부활을 소망케 하는 종말론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로 높이심으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의 주되심을 시인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뜻에서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을 고백했고 믿었던 것입니다(빌 2:9-11).
신앙은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더욱 굳건해집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과 마음에 믿는 것은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마음에서 믿는 만큼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진정한 신앙 고백을 전제한 것으로서 외식적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입에서 마음으로’의 순서는 인용문 신명기의 순서를 따른 것으로 10절에서는 그 바른 순서, 즉 마음속에 믿는 것과 입으로 고백하는 자연적인 순서로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입술의 고백이 있을 때 진정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은 미래형으로 종말론적 구원을 언급한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의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결국 입으로 시인하게 하며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순간 구원을 받고 의로 인정받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고백할 때 완전한 구원, 즉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사는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름
그러므로 바울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먼저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합니다. 즉 ‘마음으로 믿는 것’이 되어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즉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고백하는 신앙에 이르게 됩니다(고후 5:14-15). ‘의에 이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얻어지는 ‘의(義)’, 즉, ‘칭의’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신앙의 기초이며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 앞에서 주 예수를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신앙을 아무 두려움 없이 공언하는 것입니다(마 10:32;막 8:38;눅 12:8). 특히, 시인하는 것은 지적인 확인을 넘어 생활의 차원에서 삶으로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강요당하고 핍박받을 때 주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런 시인은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갈 때 직면하게 되는 구체적 탄압과 고난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구원을 정직하게 표명(表明)하는 차원까지도 의미합니다.
2.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1-13)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아니함
바울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게 됨으로“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이는 이사야서 28:16로부터 인용된 구절로서, 좀더 강조된 형태로 인용되었습니다. 즉 '저를 믿는 자'란 말 앞에 '누구든지'란 말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구원이 유대 민족에게만 독점되어지고 또한 이방인에게 있어서는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할례를 받은 자에게만 국한시켰던 것을 확장시켜 이제는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자에게 허락되어졌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부르는 자들의 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일에 있어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음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이 문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그 어떤 종족이든지 차별을 받지 않고 똑같이 적용되어집니다. 설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어떤 면에 있어서는 '차별'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원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3:22). 그런데 바울은 실제로 그의 서신서에서 유대인의 우선권에 강조점을 두고 있었고(1:16;2:9, 10),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Covenant) 아래서는 이스라엘이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였습니다(3:1, 2:9:4, 5). 그러나 이는 구원 경륜의 순서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특권을 받은 것을 나타낼 뿐입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유대인과 헬라인, 기타 이방인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없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 누구든지 차별이 없는 이유는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구원이 유대인과 헬라인 그외 모든 이방 민족에게 차별이 없는 분명한 이유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의 주’로 묘사하고 있는데 만일 유대인이 하나님을 주님(Lord)으로 믿고 있다면 그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주님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3:29, 30). 이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구세주(救世主)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동일합니다. 그는 유대인과 헬라인 기타 이방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십니다. 더구나 주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부르는 모든 자를 부요하게 하십니다.' 이는 주님의 부요함을 말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의 보편적이고 동일한 은혜가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부요하시도다'는 능동적인 개념으로 '자비하다'와 '은혜롭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구원의 은혜와 그 능력은 무한하여 그가 부르는 모든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려는 선한 뜻은 결코 약화되거나 다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부요하신 주 하나님께(시 50:10-12; 학 2:8; 엡 3:8; 계 5:12)속하여 항상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됨으로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2:4; 9:23; 요 10:10; 고후 8:9; 엡 2:7).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의 구원
누구든지 주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 이유를 더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바울은 구약성경에서 요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앞절에서 말한 내용을 더욱 강력하게 확증하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사실은 이미 구약성경 요엘서 2:32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예언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요엘에 의해 약속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베드로는 예수님 승천 후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설명하면서 인용하였습니다(행 2:16-21). 바울도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요엘서의 '여호와'를 ‘주’(Lord)와 동일시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실제로 70인역(LXX)에는 언제나 '야웨'를 관사가 없는 '퀴리오스'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퀴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구약에서의 '야웨'가 곧 그리스도 예수와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강력한 증거가 되게 하며 또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구원 사이에 완전한 연속성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란 주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자 곧 주를 믿는 자를 가리킵니다. 이와 같은 자는 하나님의 칭의를 받아 구원 받은 자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3. 입술로 고백하는 신앙생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우리가 입술로 고백하는 신앙생활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첫째,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인해 이루신 구속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의 삶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가 되심을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기도와 찬양을 통하여 고백합니다.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주님이 나의 주되심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간증을 통하여 고백합니다. 만나는 사람에게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증거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삶속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며 삽니다. 나의 주되신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아뢰며 의뢰합니다. 작은 일 하나라도 주님께 의뢰하며 나갈 때 주님이 나의 주가 되십니다.
주님이 나의 주님이 되심을 고백하는 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죄 때문에 나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고백하는 것이요,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음 받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십자가 은혜가 아니면 지금도 도무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 수 없음을 인정하며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이 나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받아야만합니다. 아멘은 “그렇습니다. 그대로입니다.”라고 동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멘을 하면 그대로 살기에 힘쓰게 됩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고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거짓된 것입니다. 물론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연약하여 넘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넘어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해야합니다. ‘나는 할 수 없어. 주님이 능력 주셔야 할 수 있지’라고 변명만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지 않고 오히려 퇴보할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를 쓸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할 때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할 때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며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예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일로 발전합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의 몸된 교회공동체의 성도 한사람 한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할 때 교회공동체가 함께 예배드리는 예배당을 사랑하고 깨끗이 하는 것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며,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당을 청소하는 일에 동참해야할 것입니다.
둘째,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주가 되심을 고백한다면 아직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주님을 만나도록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원하시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하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라면 누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자신이 주님을 자신의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렇게 주님을 고백하는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의 심령에 담대함이 생깁니다. 그리고 더욱 주님을 신뢰하게 되고 믿음이 더욱 성장합니다. 어떤 환난이 와도 능히 견딜만한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실제로 환난 속에서도 즐거워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자신의 믿음이 성장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우리의 삶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삶이 될 것이고 우리의 주변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 일이 점점 더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