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 설교

[스크랩] 복음의 능력

kaporet 2008. 6. 8. 16:05

복음의 능력

로마서1: 8-17

2008.6.8(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우리 성도들은 모두 복음을 듣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믿음대로 말씀대로 사는 일에 익숙치 않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도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일에 서툰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했습니다. 로마교회는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서 구원받은 이후 정말 하나님의 복음에 합당한 자로 살려고 했고 그 결과 로마교회는 로마 전 지역에 그 믿음의 소문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하나님의 복음을 더 전하고 싶어서 가고자했으나 갈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 한 것은 복음의 능력 때문입니다.


1. 로마의 성도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 사도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 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롬 1:8-12)


    로마교회로 인하여 감사하는 바울


    사도바울은 로마교회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믿음으로 세워져 감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바울은 "첫째는"이란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그저 ‘무엇보다도 먼저는’ 감사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8에 말하기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 것 같이, 언제나 어쨌든지 먼저 감사의 조건을 찾았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교회가 성장되는 것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은, 그 무슨 일이든지 그리스도의 중보역할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감사하는 일도 은혜를 받는 일도 그리스도를 힘입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힘입는 길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있는 때엔 죄인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지만 신앙이 없는 때엔 소위 의인(義人)이라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복음을 믿은 로마교회가 이제는 그 믿음이 세상에 전파되어서 자신의 귀에까지 들려올 때 바울은 감사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비록 로마교회에 직접 복음을 전하지는 않았으나, 그리스도를 믿는 동일한 믿음 때문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는 로마교회의 부흥소식을 들을 때 정말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자신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이 로마교회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하심을 듣고서 사도는 감격한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사도들이 가서 복음을 전한 것도 아닌데 오순절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의 복음을 듣고 돌아간 성도들이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 후 로마에 들어간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안디옥교회에서 복음을 들은 성도들이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자생적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교회의 믿음의 소식이 세상에 전파되어 옴을 듣고 사도바울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 믿음’이란 말은 그들의 믿음 생활 전체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감사 제목으로서 그들의 신앙생활 전체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믿음은 단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나타나는 믿음의 생활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로마교회가 그들의 삶속에서도 믿음의 생활을 나타내고 있음이 소문으로 들려왔다고 증거합니다. 그때 로마는 큰 도시였고 교통의 중심지였으니 만큼, 교회의 일이 각처에 퍼졌을 것입니다. 비록 그 소문이 세상 사람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어도 당시 성도들에게 그 소문이 들렸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일을 매우 귀중히 여겨서 그렇게 평가한 것입니다. 곧, 여기저기서 참 신자들이 그들을 알아주어도, 그것은 온 세상이 알아주는 것과 같은 큰 영예라는 것이다.


    로마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바울


    사도바울은 로마교회의 부흥의 소식을 들으며 로마교회를 위하여 기도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 그의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자신의 증인되신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은, 복음을 전하는 그것이었습니다. 이를 보면 그가 복음 전파를 자기의 출세나 생계나 취미를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소명감에 끌려 행하여지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모든 전도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을 위하는 의식이 그 지배 의식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되 그의 심령으로 섬긴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심령"이란 말은 영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내 영(靈)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함은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인격의 중심으로 하나님께 봉사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신력과 체력의 전부를 다하여 봉사함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무엇을 구하기 위하여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종교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여 자신의 신을 섬깁니다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그 심령으로 섬긴다고 고백합니다. 적당히 겉으로만 섬기는 것이 아닌 심령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증인이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무슨 증인이 되신다는 말씀입니까? 사도가 로마교회를 인하여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증인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진실함을 증명하는 최대의 표현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실 정도로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로마교회를 위하여 기도를 쉬지 않습니다. 비록 자신이 전도해서 세워진 교회는 아닐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워진 교회는 사도가 세운 교회와 동일한 교회이기 때문에 로마교회를 위하여 기도한다고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로마교회에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기를 원한 바울


    사도바울은 로마교회에 나아가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좋은 길을 얻어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어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라는 말은 하나님의 섭리적 의지를 말합니다. 그가 로마에 가려고 해도 교통 사정으로 길이 막혀서 갈 수 없이 되어 있는데, 앞으로는 그 사정이 섭리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라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로 가는 일에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고 말합니다. 여기 ‘좋은 길 얻기를 구한다’는 말은  성황 혹은 이득을 의미합니다(고전 2:16). 바울의 이 기도는 성취되어, 후에 그가 로마에 가게 되었습니다.(행 27:1-28:29). 그러나 그로 하여금 거기 가게 한 길은, 얼른 보면 좋은 길이 아니고 이상하게도 소송건에 끌려가게 됨이었습니다. 그 길은 대단히 위태하여 그가 여러번 파선 당해 죽을 뻔한 것입니다(행 26:32-27:44). 곧 그의 로마행은 육신적으로 괴로운 길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익을 얻는 길에 대한 바울의 기도 응답이었습니다. 경건한 신자에게 있어서 이익을 얻는 길은 반드시 평안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육신상으로 불행스러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충성하다가 혹시 고생길에 설 때에도 낙심치 말고 도리어 그것이 유익 있는 오묘한 길인줄 믿고 기뻐할 것입니다.

     바울이 그처럼 로마교회에 가기를 원했던 것은 로마교회에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기를 소원했기 때문입니다. 여기 "무슨"이란 말은 그것은 아직 받지 않았으나 장차 받을 어떤 신령한 은혜를 염두에 둔 말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는 도상에 오를 때에 반드시 로마의 신자들에게 풍성한 영적 축복이 임할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15:29). 주의 종이 주님의 시키시는 일에만 순종하며, 언제나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영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신령한 은사"란 것은, 초자연적인 것인데 그것이 물질적 혹은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눠주다"란 말은 은혜를 나눠 주는 자 자신도 남들과 함께 그 은혜에 참여함을 가리킵니다.

    사도바울이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면서 깨달은 진리들을 로마교회에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론 로마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믿어 이미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복음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교회에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기를 원했습니다. 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늘 날 많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 믿음까지는 잘 배우지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뒤 영적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이 영적으로 살기 위한 복음을 나누어주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교회가 견고하게 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너희를 견고케 함’라는 말은 직역하면 "너희로 견고케 되게 하려 함"입니다. 곧 바울이 자기 힘으로 그들의 신앙을 굳게 할 수 있다 함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굳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신앙을 장성케 하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니(고전 3:5-7), 여기서도 바울은 자기의 할 수 있는 일과 하나님의 하실 일을 구분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전한 하나님의 복음을 로마교회가 듣고서 믿음이 견고하게 서는 때 그로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기 위함이라고 고백합니다.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은 신앙상 위안을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세상에 부딪쳐 끊임없이 피곤해집니다. 그러므로 이런 안위는, 우리에게 매일 음식과 같이 계속 공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안위는, 염세주의에서 찾아 만나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 안에서 성도들의 교통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내 신앙이 피곤해졌을 때에 남의 열심 있는 신앙을 보아서 용기를 얻게 되며, 또 본래 튼튼한 신앙도 다른 사람의 모본을 보고 더욱 힘을 얻는 것입니다. 사도는 로마교회가 자신의 전한 복음을 통하여 굳건히 세워질 때의 기쁨을 생각한 것입니다.


2. 복음의 빚진 자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13-15)


    복음에 빚진 자


    사도바울은 로마교회에 복음을 전하고자 로마에 가기를 소원하고 애썼지만 지금가지 길이 막혀있었습니다. 사도가 이처럼 로마에 가려했던 것은 로마교회가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세상에 두시는 목적은, 그들이 영적(靈的)으로 결실하게 되기 위함입니다. 그들의 처음이 좋지 못했어도 나중에는 좋을 수도 있습니다. 신약의 사울(바울)은, 처음에 비록 패역했으나 한 번 회개한 후에는 주님을 충성되이 섬겼습니다. 마가도 처음에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 가다가 낙심하고 돌아섰으므로 바울에게 불신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후에 회개하고 귀한 종이 되었으므로, 바울이 그를 자기에게 유익한 종으로 여겨 모든 교회에 추천하였습니다(골 4:10). 이와 반대로, 어떤 신자들의 처음이 좋았다 할지라도 그 나중이 좋지 못한 것은 그들의 실패를 의미합니다(겔 18:21-24). 구약의 사울은, 처음엔 하나님의 총애를 받았으나 후에 패역한 길로 갔으므로 그 말년에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열매"는 주로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신자 자신의 성결의 열매요, 둘째는 다른 사람을 복음으로 인도하는 전도의 열매입니다(요 15:1-6 ; 눅 13:6-9 ; 막 11:11-14, 20-21).

    바울은 다른 이방인 지역에서와 같이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고자 로마교회에 가려고 여러 번 힘을 써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신자들의 길을 언제나 열어 주시지 않고 때로는 막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아니 하심이 아니라, 그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입니다.

    사도바울은 헬라인이나 유대인에게 복음에 빚진 자라고 고백합니다. 빚진 자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갚아야할 채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채무라는 것은 누구에게 빌린 것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냥 받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채무는 반드시 갚아야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핍박자입니다. 비록 주님께서 자신을 용서해주셨지만, 항상 바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 빚진 자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자신에게 부탁하신을 생각하면 지금도 생생한 빛 가운데서 자신이 이방인 전도자로 일하게 될 것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항상 헬라인에게나 유대인에게는 복음에 대해 빚진 자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이 있다고 자랑하는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에게나 복음은 전파되어져야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빚진 자라고 말합니다.


    복음전하기를 원하노라


    복음의 빚진 자로 여기는 바울은 할 수 있는 대로 로마교회에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제라도 복음의 진수를 전해주어 그들이 복음을 다시 듣고 더욱 신령한 것들을 깨닫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원한 것입니다. ‘할 수 있는대로 복음전하기를 원하노라’는 말은 자기로서는 복음 전하는 것을 뜨겁게 원하나,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기다려 한 후에야 그 소원대로 행동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어떤 선한 사업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려 행하지 않고 조급하게 행함은, 도리어 무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복음 전한다는 것은 이미 믿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리라는 말씀으로서, 벌써 믿는 자들에게 복음의 지식을 가르쳐 줌도 일종의 전도인 것입니다.


3. 복음의 능력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


    사도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부끄러움"이란 것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곧 사람이 자기의 소유가 무가치하여 부끄러워함과 자기의 성질이 겁약하여 부끄러워함입니다(딤후 1:8, 12-18 ; 히 2:11 ; 고후 10:8 ; 빌 1:20 ; 눅 16:3 ; 요일 2:28).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소유한 복음 전파의 사명을 무쌍한 영광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런 귀중한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복음 운동과 및 자기를 위하여 염려할(염려는 겁에 이르고 겁은 부끄러움에 이름) 처지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본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던 사울이었으나, 다메섹으로 가던 도상에서 그리스도에게 붙들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의 안에 사시는 이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에게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 되는 줄로 느껴졌습니다(빌 1:21).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복음에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나서 사망에 이르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보내시어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신 사실을 믿는 자는 자기의 죄에서 용서함을 받고 구원 얻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환경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육체의 질고와 인생의 문제로부터 해결을 받게 됩니다. 즉 이 복음을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얻는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모두 구원을 얻습니다.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이 순서는 민족 차별의 순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의 순서를 가리킬 뿐입니다(3:1-2.9 ; 1-13, 11:1-6, 15:9 ; 마 15:24 ; 요 4:22 ; 행 1:8 , 13:46 참조). 구원의 복음이 왜 이스라엘 사람을 먼저 찾았습니까? 복음이 이스라엘을 먼저 찾은 것은, 이스라엘 자신을 위하는 동시에 꼭 같이 이방인들도 위한 것입니다. 곧, 그것이 이스라엘 자신에게 구원을 베푸는 행동인 동시에,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을 전하는 제사장(이스라엘은 이방인에게 제사장이 됨)으로서의 행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사역을 통하여 많은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 하셨습니다(창 12:3 ; 출 19:5-6).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


    하나님의 복음에 그처럼 능력이 나타난 것은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로 제공되셨음을 말함입니다(고전 1:30). 우리는 우리로 말미암아 행하여진 무엇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하여 행하여진 그리스도의 의(義)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의(義)는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고 다만 그리스도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인정하여 주는 것뿐입니다. 이 의(義)는 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인데, 그 의로 말미암아 신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 의(義)는 완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서 행위로서 의로워지려고 노력했던 이스라엘은 결국 실패했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자는 이 세상에 한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에 부딪치면 그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달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에는 의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인간이 무엇을 행하여 의를 얻고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어 놓으신 의를 통하여 복음을 믿는 자에게 그 의가 적용되어서 믿는 자가 의로워지는 의입니다.  사람으로는 아무도 의에 이를 수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인하여 의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다"라는 말은, 첫째로 하나님의 정하신 구원의 때가 이르렀다는 뜻(갈 4:4) 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義)는 신자들에게는 바로 종말을 현재화시켰다는 의미도 됩니다. 이 의(義)를 받는 자는, 세상 끝날에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벌써 심판을 받았습니다. 인자(人子)가 땅 위에서 사죄하는 권세가 있다고 한 대로(마 9:6), 신자들은 벌써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와 칭의를 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죄와 칭의를 못받은 자는 내세(세상 끝날 심판 때)에도 그것을 받지 못합니다(요 3:18). 둘째로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난다는 말은 그것이 영원 전 하나님의 작정에 감취었던 것이라는 뜻을 내포합니다(엡 3:11). 이 감취었던 것이 나타난 것을 보는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감사히 그것을 받아야 됩니다(엡 3:5). 셋째로 그것은, 사람이 복음을 믿는 그 현재에 하나님의 의(義)와 접촉되고 또 받아지는 상칙(常則)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살게 함


    하나님의 복음에 나타난 의는 복음을 믿는 자에게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믿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믿는 믿음은 그 사람을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게 하고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그 삶은 오직 믿음으로 살게 됩니다. 이제가지의 인간의 행위를 통하여 무엇인가 얻으려했던 것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만으로 살려는 것을 보여줍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결코 환경에 의하여 흔들림이 없이 자신의 가치기준을 버리고 모든 판단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살게 될 때 그의 삶 전체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삶으로 바뀌어 갑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믿음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말대로 잘 되질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현실과 자신의 믿음과의 괴리가 있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보면 현실과 믿음과의 괴리가 있을 때일수록 오히려 믿음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을 지식으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잘 안 되는 것이 또한 현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합니다. 복음의 능력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보이신 사랑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승리를 확신해야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어놓으신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될 것으로 확신할 때 믿음으로 살게 되고, 우리의 삶속에 승리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해도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이 우리로 승리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신다는 승리의 확신으로 살게 됩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서는 주님과의 교제의 시간을 더 긴밀히 갖아야합니다. 그것은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하여 가능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세밀한 음성을 듣기 위해서 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음성을 깨달을 때 우리는 믿음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출처 : 센다바중앙교회
글쓴이 : kaporet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