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 설교

[스크랩] 믿음으로 사는 성도의 축복

kaporet 2008. 6. 8. 16:03

믿음으로 사는 성도의 축복 

갈라디아서 3:1-14

2008.6.1(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무엇인가 이루어보려고 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성취감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자기발전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자신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범죄한 아담의 죄성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에덴동산을 지키라고 위임받을 때 그는 자신의 힘으로 그 일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동산을 지키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의 능력과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방법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자신의 힘으로 에덴동산을 지키려고 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오히려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말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후예인 인간은 끊임없이 아담의 흉내를 내어서 자신의 힘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줄 알고 율법을 지키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기 보다는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으므로 이제는 그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사도는 자신이 육체 가운데 살 때 자신을 위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와 같은 사도바울의 고백은 성도의 믿음이 구원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사역을 이루어놓았어도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자신의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적용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 중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합니다. 그들은 정말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구원의 원인이 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도 그것을 외면한채 다른데서 구원의 길을 찾으려하다니 말입니다.


1.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려는 사람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1-3)


    어리석은 갈라디아사람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이같이 “어리석다”라고 말한 것은 돌이킬 수없는 죄에 대해 책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죄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질책하는 것입니다(롬 1:14;딤전 6:9;딛 3:3).   갈라디아교인들이 사도바울에게 어리석다고 책망을 듣는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밝히 보이는데도 이를 부인하려하기 때문입니다. ‘밝히 보이다’라는 말은 ‘공적 선언으로 발표하다’ ‘미리 기록하다’ 등의 뜻으로 바울이 이미 과거에 편지를 통해서나 직접 방문하여 복음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자신이 처음 갈라디아를 방문했을 때 선포하였던 복음의 진리들을 상기시키면서 그때에 그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선명하게 전파하였음을 강조합니다. 그 의미는 너무나 선명하여 마치 공공 게시판이나 그림과 같이 육안으로 볼 수 있게끔 제시했다는 뜻입니다. 특히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밝히 보이다’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사건이 과거에 이미 이루어졌으며, 그 십자가의 공효(功效)가 여전히 지속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고전 2:2,10). 그 효과의 지속성은 갈라디아 교인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성도들을 포함하여 복음의 핵심을 듣고 믿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작용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도 그 복음을 떠나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은 누군가의 꾀임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한 거짓교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꾀더냐’라는 말은 ‘거짓된 칭찬이나 음흉한 눈으로 악을 가져오다’ 또는 ‘악한 술책으로 타락시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로서,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 거짓 교사들이 누구냐 하는 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찌 선명한 복음의 핵심을 잃어버릴 수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령을 받았는지 기억하라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고 질문합니다. 이것은 갈라디아교인들이 구원의 결과로 받은 성령을 어떻게 해서 받았는지 다시 회상케 함으로서, 그들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줄 알게 함입니다. 여기서 ‘율법’은 구원에 이르는 수단으로서의 ‘믿음’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24절)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지만 갈라디아의 율법주의자들은 오히려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를 던진 것입니다. 이것은 곧 율법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들음이 요구된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들음’은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롬 10:14-17). 또한 베드로는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는 것을 주장하며 전파하는 자의 소명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행15:7). ‘들음’은 전파하는 자와 성령의 사역으로 되어지는 것이기에 불완전한 인간이 행하는 행함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은혜의 방편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려는 어리석음


    사도바울은 성령을 받은 것이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 분명하거늘, 오히려 율법의 행위로 구원얻는 줄로 착각하고 유대주의자들의 거짓가르침에 따라가는 갈라디아교인들을 어리석은 자로 말합니다. 왜 어리석은 일을 하는지 책망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려는지 묻습니다. ‘육체’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첫째는 할례를 자랑으로 여기는 자들이 내어 보이는 인간의 신체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으며(6:13), 둘째는 본 절에서와 같이 성령의 하시는 일과 대조를 이루는 인간적인 삶의 방식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본 절에서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두 번째 의미로서 육적인 자아(自我)를 십자가에 못 박은 성도가(2:20) 어떻게 다시 그 육체적 자아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은 성도는 성숙한 신앙의 열매(5:22, 23)를 맺기 위해 부단히 정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며 다시는 율법의 종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일은 듣고 믿음에서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갈 3:4-7)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사도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이 복음을 듣고 나서 받은 여러 가지 영적인 경험들이 과연 헛되이 받는 괴로움에 불과한 것인가 반문합니다. 여기서 ‘괴로움’은 ‘선한 또는 악한 경험을 하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악한 의미에서의 괴로운 경험과 선한 의미에서의 영적 경험이라 해석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선한 의미의 축복된 영적 경험으로 해석하여 ‘너희가 그렇게 풍성한 영적 축복들을 받았는데 그것을 헛되게 하려느냐?’라는 의미로 본문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성령의 풍성한 능력을 받았다고 말하는 5절과 갈라디아 교회가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소욕(所欲)을 따라 행하려느냐는 3절과 본문을 연결시켜보면, 하나님께서 성령 주심(3절), 하나님께서 갈라디아 사람들 가운데 능력행하심(5절)등 긍정적이고 영적인 경험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그런 영적 경험이 “과연 헛되냐”라고 묻고 있는데, 이것은 ‘아니오 헛되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을 기대하고 수사 의문문입니다. ‘헛되냐’라는 말은 ‘아주 보잘것 없는 무가치한 것’을 의미하며 여기서는 ‘믿음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진정 그들이 믿음에서 떨어져나간 상태에 거하게 된다면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사역과 성령의 풍성한 은사와 또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가졌던 사랑과 수고한 모든 열심이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4:11).


    성령을 주시고 능력을 행하시는 하나님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인에 “성령을 주시고” 그들 가운데 “능력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이것은 갈라디아교인들이 이제는 율법의 행위를 택해야할지 믿음을 택하여야할지를 결정해야만 할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주시고 능력을 행하시는’ 두 사역은 현재 분사를 사용하여, 과거에도 사역하셨지만 지금도 사역하시는 현재적인 의미를 보다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처음 회심할 때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만 베풀어질 수 있다는 제한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보혜사 성령이 율법과는 달리 값없이 주신 선물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아브라함


    사도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아브라함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전제하고 구약의 내용에서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은 무엇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습니까? 바울이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특별히 아브라함을 논쟁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무할례시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실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절의 ‘의(義)’는 어떤 의미로 쓰였습니까? 첫째, ‘법률적인 칭의’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행위 역시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인정받기에는 부적합한 것이었으므로 아브라함의 ‘의’역시 선언적 의미가 큰 것은 사실입니다. 둘째, 또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가지는 그의 올바른 태도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 15:6에서 볼 수 있듯이 아브라함이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 것이 하나님께 의(義)로 인정되었다고 봅니다.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한 태도를 보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의롭게 여겼다고 봅니다.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한 태도를 보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의롭게 여겼다고 봅니다. 두 견해들 모두에게서 중요한 것은 의롭다 하는 것이 아브라함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의롭다하시는 이’는 바로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의 ‘의(義)’ 역시 신약 백성이 우리의 의(義)와 같이 대속하신 구세주의 은혜로 얻게 되는 것이며, 단지 아브라함은 이미 계획된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선취된 ‘의(義)’일 뿐입니다(고후 5:21). 시간상으로 아브라함의 의(義)는 할례를 받기 이전에 인정되었으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한 믿음과 순종의 태도를 보이기 이전임을 상기시키면서 바울은 자기 교만과 의를 자랑하는 유대주의자들을 책망함과 동시에 할례의 무용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아들이 된 성도


    시도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할례받지 아니한 믿음의 무리들을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유대주의자들에게는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여기서 ‘아들’은 일차적으로 육신을 통하여 태어난 자손들을 의미하지만,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조직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가계(家系)와 상관없이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마태복음 12:27에서는 종파의 일원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본절에서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을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과 이들을 동격으로 취급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영적 자녀들로서 아브라함에게 부여된 구원의 약속을 상속받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29절; 롬 4:13; 엡 3:6)


3.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믿음의 사람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8-10)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사도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을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부른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정하실”을 성경이 미리 알고 아브라함에게 전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계획하십니다(롬 3:21). 하나님의 작정은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에 세워져서 역사의 과정 속에서 변함없이 지속되는 영원한 것입니다(엡 1:11). 따라서 한번 작정된 하나님의 의지는 변하거나 죄인의 반항에 의하여 실패하거나 좌절되지 않습니다(사 46:10). 하나님의 포괄적인 작정은 아브라함의 구원 계획을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셨습니다.

    “성경이 미리 알고”라는 말씀에서 ‘알다’라는 의인화된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 성경을 의인화시키는 것은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좀 더 밀접하게 묘사하기 위함이며, 하나님과 말씀이 동격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에게 작정되고 전하여진 복음은 기록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주된 내용은 ‘너를 통하여 모든 이방이 복을 받으리라’(창18:18; 22:18)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이 장래에 관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 것과 일맥상통하며 그것이 곧 복음의 내용임을 보여줍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의 복과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의 저주



    사도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의 복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약에 나타난 '복'은 부모가 자녀에게 말로써 빌어주는 것으로, ‘건강’, ‘장수’, ‘재산’ 등 다분히 현세적이며 물질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었지만(신28:6), 본절에서의 ‘복’은 영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으로 믿음으로 인하여 아브라함과 같이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구원을 의미합니다(벧전 3:9). ‘복’은 어느 개인이나 특정한 민족들에게만 제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방민족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누렸던 축복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롬 4:24)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방편으로 삼고자 하는 자는 모두 저주 아래 있다는 바울의 말은 죄의 보편성(普遍性)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율법을 따르는 자들은 칭의를 받을 수 없다’라는 율법 자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라기보다는, 율법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모든 율법을 지키더라도 하나의 율법을 어기면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는 인간의 완벽할 수 없는 연약함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하나의 율법도 어기지 아니하고 모든 율법을 지킨다면 그는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율법의 기능이 인간의 죄인됨을 드러내는 것이며 또한 모든 사람이 율법을 따라야 하는 필연적인 의무를 가졌음에도(레 19:2) 불구하고 이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롬 7:24).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율법은 단지 정죄와 진노의 기능을 가질 뿐입니다(롬 4:15;5:16, 18).


4.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1-14)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사도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구약에서 인용한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합 2:4)는 구절은 원래 하박국이 갈대아인의 침공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즉 사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하박국은 하나님을 향한 겸손과 신뢰로 이와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하박국의 입장이 다르지만 필할 수 없는 위기와 저주 가운데서 믿음으로(롬 1:17) 여호와를 바라는 것은 동일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앞에 살고자 하는 자는 오직 ‘믿음’에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의인이 믿음으로 살아야할 이유는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행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바울은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구약을 인용하여(레 18:5) 믿음과 율법이 조화될 수 없는 관계임을 증거합니다. 율법으로 행하려는 자들은 끝까지 율법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율법을 행치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27:26). 결국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구원하시지 아니하는 심판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저주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딛 3:4, 5).


    성도가 믿음으로 살아야할 이유


    성도가 율법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야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줄 알고 열심히 행하였으나, 결국 율법은 인간이 죄인임을 판단하는 기능 외에는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를 구속하시는가를 설명합니다. ‘속량하다’라는 말은 ‘값을 치르고 사다’, ‘되돌려 사다’ 등의 의미를 가지며, 여기서 이 말은 율법의 노예가 된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고 사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대가는 십자가의 피였습니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전(贖錢)의 개념에서 해석되며(출 21:30) 아들을 나무에 달리게 하는 저주(신 21:23)까지 받게 하신 것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합니다(사 53:6).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우리를 속량하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성도들을 구속한 목적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복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는 것이며 둘째는, 믿는 자들이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은 신약의 성도들에게 널리 미치게 되었고(9절), 성령의 약속은 예수의 부활 이후 성취되었습니다(요 14:16-18; 행 1:4). 이처럼 의롭다함을 얻는 것과 성령을 선물로 얻는 것은 아브라함이 받은 복과 같은 성격임을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에게 미치는 아브라함의 축복이 하나님의 약속이듯이(8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성령을 받게 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눅 24:49).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확신해야합니다. 우리는 옛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서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삶은 자신의 옛 자아가 이미 죽은 것을 의식하면서 살아야합니다. 옛 습관이 나올 때마다 아파하고 회개를 하면서 옛 습관을 버리는 삶이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늘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말하면서도 자신 안에 아직도 나타나는 옛 자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 맡기고 성령의 능력으로 옛 습관이 자신에게서 제거되는 것을 발견해야합니다. 성령의 소욕이 육체의 소욕을 제어하시기 때문입니다(갈 5:17). 둘째, 성령으로 살아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된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셔서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의 모든 삶속에 함께 하시게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살 때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가능합니다. 성령으로 사는 것은 성령으로 행하는 것입니다(갈 5:25). 성령의 지혜로 생각하고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행할 때 우리는 성령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며, 이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맛을 보며 사는 것입니다.

출처 : 센다바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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