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 설교

[스크랩] 예수님께로 오면 쉼이 있다

kaporet 2007. 12. 30. 16:17

예수님께로 오면 쉼이 있다

마태복음 11:25-30

2007.12.9(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많은 사람들이 우리 인생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채 기나긴 여행을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정말 우리는 인생의 여러 가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건강의 문제, 직장의 문제, 아내나 남편 그리고 자녀 등의 가족의 문제 등 우리는 하루도 쉴 날이 없이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혀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을 바다에 항해하는 배와 같다고도 말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고난의 떡을 먹어보지 않은 자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실재로 인생은 행복한 삶보다는 수고 하고 무거운 짐을 진채 고난을 당하는 순간이 더 많은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을 왜일까요? 그것은 우리 마음에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육체의 평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평안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자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니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5-27절)


    변질된 신앙의 사람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받은 민족으로 자부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축복의 언약을 주신대로 자신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살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땅을 주셨습니다. 애굽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나오시고 시내산에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그들이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들이 들어가는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라고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온전하게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서 가나안의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갔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70년간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사는 훈련을 다시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70년이 되었을 때 메대 파사의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그들 중에 원하는 자들은 모두 유대땅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백성들은 선지자들의 가르침과 격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형식적으로 점점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켜서 장로들의 유전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선적으로 적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일에 점점 더 어두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셨어도 예수님께 관심을 갖는 자들은 소수의 사람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무식한 갈릴리 어부출신과 여인들과 창기와 세리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는 많은 지식층의 사람들, 즉 제사장이나 바리새인 및 율법학자 등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런 자들에게 버림받고 무시당하는 그룹인 창기와 세리들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고백한 일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심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은 누구이며 어린아이들은 누구입니까?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인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을 말씀합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만이 지혜롭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치심에 대하여 언제나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단지 나사렛 마을의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나 사역에 대해서는 언제나 경계만 하였지, 왜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치시고 또한 어떻게 그런 놀라운 능력으로 사역하셨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인정하고 하늘로부터 오신 선생이심을 고백합니다(니고데모, 아리마대 요셉). 심지어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하여 의심하면서 예수님이 사단의 힘을 빌려서 그렇게 하신다고까지 비난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어린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린아이들처럼 순진하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과 세리와 창기들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소위 있는 자들에게 언제나 소외되고 무시되어왔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치심을 듣고서 예수님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아무런 소망도 없고 항상 가진 자들과 지식층에 의해서 무시함을 받고 업신여김을 받아서 살 소망까지 끊어진 상태에 있던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말씀 그대로 복음이었습니다. 정말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단지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이심을 받아들이고 믿기만 하면 자신들의 인생이 바뀌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때까지 아무런 소망이 없었던 그들의 삶이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뜻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잠 3:34; 약 4:6; 벧전 5:5).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스스로 지혜있다고 하며 교만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하나님을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겸손한 자들만이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 외에는 없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하나님을 아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부하나님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성부하나님과 예수님은 한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요 17:21,23). 따라서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아는 자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과 한분이신 예수님이 갖는 것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시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만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많은 율법학자들이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율법대로 산다고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의 지식을 조금 알았지만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데는 실패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척하고 맙니다. 다만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들만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때 예수님을 자신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라고 믿고 따른 그 사람들만이 어린아이들과 같이 순진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순진한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주시고 그들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순진한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들만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가 있습니다.

  

2. 다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지금까지 인간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지식을 동원하고 경험을 동원하고 자연을 통하여 무엇인가 하나님을 발견할 만한 것들을 찾기에 수고하였고 지쳐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보려고 율법을 지키면 되는 줄 알고 무거운 짐을 지고 그것을 행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실패했고 자신들이 상상해서 만들어낸 신을 나무나 돌이나 금과 은으로 새겨서 우상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자신이 만든 우상들에게 절하는 모습뿐입니다. 이 세상의 종교는 모두가 인간들이 자기의 사상 속에 만든 신들의 모습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이 안 계십니다. 세상의 것을 통하여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길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찾는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참 생명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얻게 하시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러면 예수님께로 오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주십니까? 예수님은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쉬게 하신다는 말씀은 안식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안식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평안과 기쁨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진 인간은 결코 안식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십니다. 언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지 모르는 자들에게 어떻게 안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인간에게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화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겠습니까? 죄인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는 날 그날이 바로 심판의 날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면 죽음이요 심판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죄인인 인간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의 값을 대신하셨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죄인된 인간은 다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의 사함을 얻고 구원받는 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평을 허락하십니다(요일 4:10; 롬 4:25; 롬 5:10).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그 화평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진정한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3. 내게 배우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29-30절)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


    예수님은 진정한 안식을 원하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온유하다’는 말은 상대방의 실수를 관대한 마음으로 용서하고 참아주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주님의 성품이십니다. 하나님은 늘 온유하심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삼하 22:36; 시 185:35). 주님의 온유하심이 아니면 이 땅에 존재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온유하심은 이 땅에 오셔서도 그대로 나타나십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낮추는 모습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당신의 자리를 비우시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시기까지 겸손하신 모습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기가지 낮아지신 모습을 보이십니다(빌 2:7-8).

    예수님은 당신의 온유하심과 겸손함을 배우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자신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멍에는 소에게 일을 시킬 때 사람이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들을 수 있도록 이끄는 도구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란 예수님과 함께 갈 때에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잘 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멍에는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을 배워서 나가면 우리는 예수님이 원하시는대로 잘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한걸음 나아가시면 따라서 한걸음 나아가면 됩니다. 먼저 갈려고 할 필요도 없이 예수님이 걸으신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을 배우면, 우리의 마음에 쉼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안식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쉼이 있습니다. 마음이 쉼을 얻는다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평안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평안은 우리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실 때 비로소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평안을 주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는 멍에


    예수님의 멍에는 우리 혼자 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쉽습니다. 만일 우리 혼자 멍에를 지고 간다면 그것은 짐이 되고 힘들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제까지 자신이 스스로 짐을 지고 가보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그 짐은 너무 무겁고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죄의 짐을 대신 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법을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대로 따라 가기만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제로부터의 삶은 단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따라가되 성령을 의지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대로 가면됩니다. 우리의 능력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느냐 함께 있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우리에게 부딪히는 문제들을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든지 해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우리는 실상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무한한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의 멍에를 예수님과 함께 메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예수님의 원하시는 대로 우리의 삶의 기준을 맞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까지의 삶의 기준은 자신이 왕이 되었던 자리를 이제는 예수님께 내어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의 왕이 되어 통치할 때는 정말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자기 멋대로 하는 즐거움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문제의 해결능력이 없는 자가 왕 노릇한다는 것은 죽기보다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것을 잡기 위하여 좇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도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갑니다. 예수님이 잠시 쉬자고 하시면 쉬고 가자고 하시면 가면됩니다. 그러는 중에 우리의 목적지인 하나님 나라에 이르러 예수님과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나가는 말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기 위하여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우리의 인생의 목표를 먼저 다시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살던 삶의 목표가 이제는 바뀌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것을 위하여 살도록 모든 생각과 계획과 생활방식이 바뀌어야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나머지는 예수님이 이끄시어 예수님의 원하시는 방향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기도를 요구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또한 우리는 예수님과 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제까지는 자신의 좋은 소견대로 살았던 것을 떠나서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함께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는 절제와 순종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하고 싶은 욕구가 나올 때 이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살피고나서 만일 예수님과 상관없으면 포기해야합니다. 물론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힘주시면 가능합니다. 예수님께 기도하고 절제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예수님께서 마음속에 무엇을 요구하실 때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을 요구하실 때 우리의 힘으로 어렵지만, 예수님께 기도하면서 예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나씩 하나씩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과 함께 사는 훈련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설정하고 우리의 삶의 방식을 예수님과 함께 사는데 익숙하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내 심령 속에 느끼며 예수님 안에서 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출처 : 센다바중앙교회
글쓴이 : kapore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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