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심판중에 구원하시는 하나님
심판 중에 구원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3:8-21
2007.11.4(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첫 사람 아담을 만드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동산에 두신 후 돕는 배필을 주시어 가정을 만드시고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가정을 주신 것은 그를 축복하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의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기 위하여 전심을 다하여야 했습니다. 그것은 일을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일에 초점을 맞출 때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다른 어떤 일보다 소중하게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일을 생각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끝내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고 말씀을 거역하게 됩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저주와 심판을 받아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1. 사람의 타락
뱀의 유혹을 받는 여자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1-6)
사람의 타락하는 과정이 창세기 3장1-7절에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주도적으로 사람을 타락하도록 역할하는 뱀이 나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모든 것이 선하므로 하나님께서 보기에 좋았더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는 창세기 3:1의 말씀은 사단이 뱀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간교하다’라는 말은 간사하고 교활하다는 말로서 다른 이를 속이고 얕은 수의 속임수로 남을 넘어뜨리려는 말로서 사단의 행위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여기서 뱀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의 하나라기보다는 이미 사단의 도구가 되어버린 상태를 말하므로 사단과 동일시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사단을 옛 뱀이라고(계 12:9; 20:2) 소개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뱀(사단)은 여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도전적으로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하여 질문한 것입니다. 이 질문의 의도는 여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깨드리기 위한 악의적인 질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동산의 좋은 실과를 임의로 먹게 하셨고 생명나무도 먹을 수 있게 하셨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은 금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나무와 생명나무는 임의로 먹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동산의 풍요로움을 아담과 하와가 마음껏 누리며 살게 하셨습니다. 다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금한 것은 그들의 지식이 현재로서도 충분하며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그것만은 하나님께 돌리게 하시기 위하여 금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뱀은 여자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질문을 하여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자유를 금하신 것처럼 말하므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악의를 엿볼 수 있습니다. 사단의 계략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항상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신뢰감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을 떠나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뱀의 질문에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대답합니다. 여자는 두가지면에서 왜곡된 대답을 합니다. 하나는 과장된 표현을 하고 또 하나는 축소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무의식중에 하나님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며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말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과장하여 말하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감이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또한 여자는 ‘먹으면 죽을까 하노라’라고 대답하므로 하나님의 말씀하신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희석시킵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시어 경계하셨는데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죽지 않을 수도 있는 듯한 뉴앙스를 풍기면서 말씀을 왜곡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을 약화시키려는 사단의 계략에 말려들어간 태도입니다.
뱀은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대답하므로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감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잡은 순간 단호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격적으로 부정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뱀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서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진실한 것처럼 말합니다. 사단은 언제나 자신을 광명한 천사처럼 가장하고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뛰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언제나 거짓말쟁이요 인간을 파멸하기위해서 거짓을 말할 뿐입니다.
뱀은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고 거짓을 말하고 나서 또 다른 거짓을 말합니다. 뱀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라고 말하여 마치 인간이 시력이 좋아져서 사물을 더 잘 보게 됨으로서 하나님과 같이 될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눈이 밝아’라는 말은 보지 말아야할 것을 보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눈이 밝아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고 말한 뱀의 말은 금방 거짓으로 판명될 것입니다. 인간이 눈이 밝아 진 것은 죄를 보는 눈이 밝아져서 자신과 상대방의 벌거벗은 수치를 발견할 뿐입니다. 선악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권한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악을 아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처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단의 어리석음을 단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을 아는 지식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해 사람이 하나님처럼 된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의 지식이 높아짐에 따라 마치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은 사단의 유혹에 의한 것입니다.
여자는 뱀의 유혹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의 지금까지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지식이 잘못 된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리고 뱀의 말이 진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때 여자의 눈에 비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타락의 과정이 보입니다. 인간이 타락하는 것은 먼저 생각하는 관점을 바꾸게 합니다. 그리고 바꾸어진 관점으로 사물을 보게 될 때 여태까지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금지되어 온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드리고 항상 불만을 가졌던 여자에게 있어서 뱀의 말은 진리처럼 들렸고 그 결과 지금까지 금지되어 온 선악과가 갑자기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게 된 것입니다. 사단의 유혹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통하여 찾아옵니다(요일 2:16). 특히 금지되었던 것에 대한 욕망은 반대로 상승하기 때문에 금지가 해지된 순간 그 욕망은 극에 달하게 되고 바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마음속에 욕망을 느끼는 순간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었습니다.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도록 여자를 지도하고 감독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가 뱀의 유혹을 받을 때 보호해주고 선악을 아는 나무 실과를 따먹으려할 때 그것을 저지했어야합니다. 그런데 그는 여자의 행동을 보고서도 수수방관하고 급기야는 여자의 범죄에 가담하여 자신도 죄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범죄 심리입니다. 인간은 사단의 유혹을 받을 때 처음에는 저항감을 느끼지만 몇 번 반복하여 유혹을 받으면 점차 저항감이 줄어들고 다른 사람이 범죄하면 즉시 그 저항감이 없어져서 죄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사단을 대적할 것을(엡 6:11) 말씀하고, 히브리서 기자는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대항할 것’을 말씀합니다(히12:4). 우리가 죄에 대하여 이길 수 있는 것은 대항하는 것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여, 말씀을 의지하여, 성령을 의지하여 대항할 때 죄가 물러갑니다.
죄의 결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7)
아담과 그 아내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결과 눈이 밝아졌습니다만, 그 눈은 하늘(하나님)에 대해서 보는 눈이 아니라 이 세상을 보는 눈이 밝아졌고 죄를 보는 눈이 밝아졌습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상대방의 벗은 몸을 보게 되었고 자신의 벌거벗은 것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자신의 수치를 가립니다. 여태까지는 한 몸을 이루어서 전혀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상대방의 벌거벗은 모습이 죄를 범한 순간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죄인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보려고 하고, 자신의 허물은 감추려고 합니다. 이것이 죄인들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나면 완전히 다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은 감추어주고, 자기의 허물은 솔직히 고백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사해주심을 고백합니다.
2. 하나님의 부르심에 변명하는 아담
하나님의 낯을 피한 아담과 하와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8절)
아담과 하와는 날이 서늘할 때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숨습니다. 날이 서늘할 때는 아마도 저녁 무렵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신다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으로 하나님을 마치 사람의 모습처럼 동산에 거니신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거니시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동산을 거니시는 것 같다고 이와같이 표현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 음성을 들을 때 반가움보다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앞에 나서서 대면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죄의식을 느낄 때 사람은 하나님의 낯을 피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가 선택한 방법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사이에 숨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변명하는 아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9-10)
하나님은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 아담과 하와를 찾고 부르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말은 하나님이 그의 소재를 모르셔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아담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기를 원하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이들이 실수하여 집안을 어지렀을 때 엄마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십니다. 엄마가 아이의 잘못을 다 알고 아이가 용서를 구하기만 하면 용서해줄 것을 생각하며 부르듯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의 죄를 자백하기만하면 용서하시기로 하고 부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아담은 단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려할 때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우리의 양심을 통하여 끊임없이 성령께서 ‘말씀을 떠나면 안된다. 말씀대로 살아야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 ‘말씀대로 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아담의 반응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보다는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을 변명할 뿐입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는 말은 단순한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선뜻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정당한 이유가 되질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벌거벗은 것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할 이유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죄를 짓기 전에는 벌거벗은 몸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아담이 벌거벗은 몸이 부끄럽게 느껴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자신의 벗었음을 인하여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고백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지적하실 때 곧잘 자신의 환경을 변명하며 그 자리를 모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있는 모습그대로 하나님께 솔직히 고백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긍휼을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허물을 다 용서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3. 심문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심문과 아담의 변명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벌거벗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의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1-12)
하나님은 아직도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보다는 벌거벗었음을 핑계하는 아담에게 ‘누가 너의 벌거벗음을’ 고했느냐고 묻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벌거벗음이 하나님을 피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벌거벗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을 자백하는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의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고 질문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아담에게 말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하신 말씀을 왜 어기고 그 나무의 실과를 먹었는지 추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위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아담에게 추궁하는 것이며 아담은 이에 대해서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만했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회개할 마음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회개할 마음을 주셔도 아무런 반응 이 없을 때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케 하십니다. 그때 우리에게 들려오는 말씀은(혹은 성경을 읽고 깨닫는 말씀은) 우리에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엄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추궁을 들으면서도 아담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내를 핑계 댑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어서 먹었다고 변명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라는 말은 하나님이 만드셔서 자신에게 주신 여자가 없었다면 자신은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여자를 주시지만 않았다면 자신이 선악과를 따먹을 일이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담은 하나님 때문에 자신이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변명을 하며 모든 잘못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문과 여자의 변명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3절)
하나님은 아담이 여자의 핑계를 대자 여지에게 추궁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하나님은 여자가 ‘어떻게 해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게 했는가’ 진상을 알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면서 질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자에게 이렇게 질문하신 것은 적어도 여자는 다른 대답을 할 줄로 기대하시고 질문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여자는 뱀을 핑계합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자의 대답도 아담의 대답과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하는 여자는 과연 아담의 아내답습니다. 하와는 하나님 앞에 진실하기보다는 자신의 허물을 덮고자 자신을 모든 잘못이 뱀에게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4. 심판 중에 구원을 약속하시는 하나님
뱀을 저주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내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14절)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은 여자의 말을 들으시고 뱀을 심판하십니다. 뱀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을 타락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러므로 뱀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영원까지 진리이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줍니다. 뱀은 저주받아서 배로 다니게 되고 또한 종신토록 흙을 먹게 될 것입니다. 종신토록 흙을 먹는다는 의미는 뱀의 여인의 후손에게 패하고서 완전히 항복하는 사단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계획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15절)
하나님은 뱀을 심판하시되 당신이 직접하시지 않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시어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 때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뱀의 머리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입니다. 사단은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시고 사단과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전체에서 첫 번째 제시되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부터 인간을 구원하실 계획을 갖고 계셨음을 말씀합니다. 아담과 그 자손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죄없는 인간이 죽임을 당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함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 없는 인간의 몸으로 오시는 것은 여인의 후손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즉 여인을 통하여 잉태되어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여자에 대한 저주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16절)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어긴 장본인이기에 그에게는 잉태하는 고통이 크게 더할 것입니다. 여자는 다른 짐승들과 비교하면 잉태와 출산의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준 남자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신이 먼저 선악과에 손을 대어 먹고 남자에게 주었으므로 여자는 이제 남자의 권위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여자는 남자를 그리워하게 되고 남자의 다스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창조시에 여자가 받았던 남녀평등의 기회를 상실하고 남자의 다스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아담에 대한 저주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한 나무의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을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17-19절)
아담이 에덴동산에서의 노동은 동산의 실과를 따먹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담은 얼굴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여도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므로 종신토록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됩니다. 평생을 수고하여도 먹고 살기도 힘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인생들은 괴로운 날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은 하나님이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신대로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아담이 흙에서 나왔으니 그가 죽으면 몸이 썩어 흙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지은 인간에게 내려진 대가입니다. 누구도 죄를 지은 인간에게 형벌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히 9:27).
아담의 아내 하와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자의 어미가 됨이더라”(20절)
아담은 여자에게 하와라 하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이는 아담의 이름의 뜻인 남자라는 의미에서 파생한 것으로 여자라는 의미입니다. 하와는 모든 산자의 어미가 될 것입니다. 즉 모든 생명이 하와를 통하여 태어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표징인 가죽옷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21절)
하나님은 자신의 벌거벗은 것 때문에 수치를 느끼며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려 했던 두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입니다. 가죽옷을 만들려면 동물을 잡아서 죽여서 가죽을 벗겨야합니다. 그때 동물은 피를 흘려야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의 수치를 가려주시기 위해서 한 생명이 죽어야함을 상징하는 표로 짐승을 잡아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입니다. 인간을 위해서 대신 죽어야 할 생명은 장차 십자가에서 죽으실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즉 가죽옷은 인간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인간의 죄의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범죄에 대하여 엄중하게 심문하시고 뱀과 여자와 남자를 저주하십니다. 각각 자신의 범죄에 따른 심판을 당한 것입니다. 이는 반드시 죄에 대한 결과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편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는 표로서 가죽옷을 지어 입힌 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의 범죄에 대한 심판과 은혜는 성경에 반복되는 모티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면서 더욱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결의 삶을 살기에 힘써야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