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 설교

[스크랩] 믿은 대로 되는 축복

kaporet 2007. 7. 2. 19:01
 

2007년7월1일(주일예배)

믿은 대로 되는 축복

마태복음 8:5-13


들어가는 말


    우리에게는 각각 소원이 있습니다.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사람들은 저마다 믿는 신들을 찾습니다. 일본에는 특히 절과 진자가 많아서 사람들이 그곳에는 비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사실 절이나 진자에서 빈다고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절이나 진자에는 인간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참 신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한분뿐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해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형식적인 모습으로 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다른 우상들과 같이 대하며 형식적으로 비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응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의 기도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믿음으로 구하여 응답받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종을 위해 간청하는 백부장(5-6절)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괴로워하나이다.”(5-6절)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신 후 문둥병자를 고치신 사건 뒤에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믿음으로 구하여 치료받은 이야기에 이어서 믿음으로 자신의 종을 구한 백부장의 감동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한 백부장이 자신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호소합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선교의 중추지로서 예수님의 갈릴리지역 사역의 본부였습니다. 당시 가버나움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서 로마의 군단급은 아니지만 팔레스틴의 분봉왕 헤롯 안디바의 보조 부대가 주둔했던 곳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이 헤롯의 관활지에 있던 것으로 보아 이 백부장은 이방 출신으로서 아마 헤롯의 용병(傭兵)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백부장은 수하에 100명의 병사를 거느린 중급 지휘관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하며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괴로워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여”라는 말은 예수님을 향한 백부장의 돈독한 믿음과 존경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는 하인의 중풍병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시기를 구합니다. 여기서 하인은 계급이나 신분상 수하에 있는 자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백부장은 자신의 부모, 혈육이나 상전(上典)이 아닌 일단 무시해도 좋은 자를 위해 굳이 와서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 구조상 천민이었던 하인에 대한 백부장의 특별한 우정이나 애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째든 자신의 수하를 위하여 체면과 만사를 제쳐두고 이처럼 간청하고 있는 이 백부장의 인간성에 새삼 경탄하게 됩니다. 어쩌면 그가 이처럼 자상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그는 로마인이면서도 유대인인 예수님에 대하여 선입관을 갖지 않고 큰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중풍병이란 말은 신체의 전체나 일부 또는 얼굴이나 기타 부위에 일어나는 마비 증상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그 원인은 매우 다양하고 또 현대에 이르러서도 완전 규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표적 원인으로는 역시 뇌졸증을 들 수 있습니다. 뇌졸증이란 뇌의 작은 동맥들이 파열되어 뇌 속에서 출혈이 일어나는 경우, 또는 뇌 속에서 혼탁한 핏덩어리가 뭉쳐져서 혈액의 순환이 막히는 경우, 발작이 일어나고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런 발작과 혼수상태가 발생되는 경우에 생명을 잃을 수도 있으며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에라도 반신불수 등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뇌졸증 이외의 원인으로 생긴 마비 증세도 중풍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어째든 이 중풍병은 문둥병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문둥병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일어난 병으로서 이 또한 그 당시에는 기적이 아니면 고치지 못하는 병으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백부장은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체면불구하고 예수님께 나아와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청을 들어주시는 예수님(7절)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7절)


    예수님은 백부장이 자신의 하인의 중풍병 때문에 당신에게 간청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즉시 가서 고쳐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 장면을 보면 주로 병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오거나 예수님의 메시지를 전달받음으로 하여 치유되었지, 예수님께서 직접 병자를 찾아가시겠다고 제안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여기서 굳이 가시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 백부장은 헤롯 용병으로서 그의 혈통적 배경은 로마인이 아닌 다른 이방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단 로마 식민 체제의 하수인이라는 점에서 로마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피지배자인 유대인은 점령자인 로마인을 착취자 내지 종교적 이방인으로서 경멸하였고 또 로마인은 유대인을 편협하고 위험한 피지배자로 멸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대적인 편견과 증오의 벽을 절대적인 사랑과 정의로써 허물어 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자신의 구원 사역이 유대인을 넘어 세계 만민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이 기회를 십분 활용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다만 말씀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말씀으로만 낫기를 원하는 백부장(8절)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8절)


    예수님이 백부장의 집에 가시어 하인을 직접 고치시겠다고 말씀하시자 백부장은 이에 대해서 자신의 집에 오시기를 거절하고 말씀으로만 치료하시기를 청합니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감당치 못하다’라는 말은 영적, 도덕적 충족성이 몹시도 결여됨을 고백한 말로서(3:11) 어떤 권위있는 대상에 대하여 인간이 스스로의 무가치함을 느낄 때 사용됩니다. 이것은 백부장이 예수님을 대면하고 분명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는 동시에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과 거룩하심을 깨달았음을 반영하는 말로서 백부장의 겸손한 심정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겸손한 영혼에게 주님의 다함없는 은혜가 필시 주어질 것입니다(시 147:6).

    예수님이 자신의 집으로 오시는 것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거절한 백부장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백부장은 분명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도 자기 하인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그의 요구는 그가 예수님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믿었음을 증명해 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말씀으로만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다는 기록은 요한복음 4:46-53의 왕의 신하의 아들을 치료하신 사건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휘귀한 경우였기에 백부장의 믿음은 더욱 돋보이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예수님을 어떤 비상(非常)한 의사로 생각했다면 특효약이나 손을 만지는 등의 치료 요법을 요청했을 것이고 또 능력있는 종교 지도자 정도로 생각했다 하더라도 기도나 안수 등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을 믿은 때문이며 이것은 그가 예수님께 대해 신적 메시야임을 고백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만으로 나을 수 있다고 믿는 이유(9절)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내가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9절)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말씀으로만 자신의 하인을 고치실 수 있다고 고백한 배경을 설명합니다. 백부장은 자신이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서 여기서 권세란 것은 로마 황제의 권한을 가리키고 있는 말로서 로마황제의 권한 아래있는 국가의 명령체제를 말합니다. 백부장은 군인으로서 황제로부터 권한의 일부를 위임받아 자기 수하에 백명의 부하를 이끌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같은 명령체계와 그 개념은 너무도 명확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백부장은 분명 예수님을 세상의 통치자인 황제 이상의 존재, 즉 자연과 우주를 복종시킬 수 있는 신적 통치자인 하나님으로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의 영적 현상의 원리를 꿰뚫어 본 백부장의 신앙의 지혜는 매우 놀라운 것이라 하겠습니다.


3.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


    진정한 믿음을 보심(10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10절)


    예수님은 백부장의 고백을 듣고서 기이히 여기십니다. ‘기이히 여기다’라는 말은 ‘놀라다’라는 말인데,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말을 들으시고 놀라셨다는 것은, 백부장의 말이 지금까지 이스라엘 중에서 들어보지 못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놀라신 것은 예수님이 모든 사건을 지배하시는 결코 놀라지 않으실 하나님이시지만, 한편으로는 놀라는 감정을 지니신 완전한 인간이기도 하셨기에 놀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좇는 자들에게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이스라엘 중에서도 만나본 적이 없는 믿음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왜냐하면 백부장은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계시하고 있는 구약적 배경을 거의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어떤 유대인들보다 예수님의 인격과 본질에 대해 더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여태까지 만나 본 유대인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말씀만으로도 병이 낫겠다고 고백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만나보지 못한 진정한 믿음을 가진 백부장을 보시고 놀라신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 거절당할 유대인들(11-12절)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11-12절)


    이어서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장차 이방인들이 천국에 들어가고 유대인중의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경계하십니다. ‘동서로부터’는 유대 지경 내 뿐 아니라 이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까지를 포함한 말입니다. 사실 선지자 이사야는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바 있는데(사 45; 6; 49:12), 본문은 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본문의 백부장이 이방인이긴 하지만 이제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게 되었음을 예언자의 말을 통해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아브라함과 함께 천국에 앉다’는 말은 전 세계 만민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임을 뜻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여호와의 언약을 받은 당사자들로서 선민 이스라엘의 신앙의 뿌리들입니다. 따라서 이 세 이름들은 이스라엘의 선민의식과 여호와 신앙의 정통성을 강조할 때에 자주 언급됩니다. 

    이어서 ‘앉다’란 말은 '기대어 눕는다'는 뜻으로서 식사 기간 중 거의 눕다시피 식탁에 기대어 앉는 유대인들의 식사 예법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잔치상에 둘러 기대는 상태를 지적한 것입니다. '식탁에 앉다'란 말은 신약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베풀어질 향연(饗宴)과 그로 인한 큰 기쁨을 상징할 때 흔히 사용된 관용적 표현입니다(마 26:29; 눅 14:15 -24). 이 잔치는 메시야 왕국의 완성을 상징하는 '메시야 잔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메시야 잔치, 곧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천국에 앉을 수 있는 자들은 이방인인 백부장이 소유했던 그런 믿음을 소유한 자들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백부장은 천국에 들어갈 자들에 대한 하나의 전형적인 모델인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세상 각처에 살고 있는 이 믿음의 소유자들은 나라가 임할 때 먼 곳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예하게 될 것입니다.

    ‘나라의 본 자손들’은 '그 나라의 자손들'이란 뜻으로서 그 나라를 상속하게 된 자, 즉 나라에 대한 합법적인 상속권을 가진 자를 뜻합니다. 여기서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유대 민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3:9, 10), 당연히 천국에 속한 자들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단순한 혈통적 순수성만으로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수 없고 믿음이 있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겠기에 결국 나라의 본 자손들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것임을 분명히 언급하셨습니다.

    ‘바깥 어두운데’는 멸망의 장소, 곧 미래에 '메시야의 잔치'가 배설되는 곳의 외부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 곳은 항상 밝은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곳은 어두운 곳으로서 어두움의 권세인 사단이 지배하는 곳 내지 영영한 절망이 있는 지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22:13). 결국 '바깥 어두운데'란 하나님과 결별된  것과 영적인 절망과 영원한 죽음과 형벌이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는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지옥의 장면을 더욱 생생하고 무섭게 묘사한 표현으로서, '운다'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고통을 말하며, '이를 간다'는 것은 깊은 절망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고통과 절망은 그들을 위해 찾아온 메시야를 거절한 것에 대한 대가로서 그 누구도 위로할 수 없고, 또 제거할 수 없는 영원한 눈물과 고통인 것입니다.


    믿은 대로 되는 축복(13절)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13절)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에 대하여 칭찬을 하시고, 장차 믿음을 가진 이방인들은 천국에 들어가나 믿음이 없는 유대인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통을 당할 때가 올 것을 말씀하신 후, 백부장의 믿음대로 될 것을 선언하십니다. 문둥병자를 고치실 때 주님은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지만 이번에는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란 말로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믿은 대로 되다”란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하시지만 그 은혜는 백부장의 믿음의 양에 따라 주어진 것입니다. 둘째, 기적이 행사되면서 백부장이 믿고 있는바 병고침이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즉 백부장의 믿음의 분량대로 그의 하인의 병이 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에게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라고 선언하실 때 즉시 백부장의 하인의 병이 나았습니다. 백부장의 친구들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그의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의 하인의 병이 나았던 것으로 보아 '그 시'란 말은 바로 그 순간, 즉 예수님의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란 말씀이 떨어진 즉시 나았던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말씀은 곧 능력이며 실행이고 창조임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의 고백은 자신의 하인의 병을 낫게 하고 또한 장차 자신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대로 축복해주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백부장과 같은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가 백부장과 같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기도한다면 예수님은 지금이라도 당장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과 너무 멀리 계신 것처럼 느끼지만, 예수님은 늘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응답해주시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예수님께 아뢰고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의 사람인 뮐러목사님은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서 그가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이 먹을 식량이 떨어질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누군가의 손길을 통하여 때로는 식량으로 때로는 돈을 보내주셔서 아이들이 굶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날 우리들도 백부장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어떤 문제도 해결된다는 믿음으로 기도하면 믿은 대로 반드시 응답받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음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출처 : 동경센조쿠중앙교회
글쓴이 : kapore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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