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5월20일(주일예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창세기 1:1
들어가는 말
오늘날 현대인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모른채 살고 있으며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참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신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흰두교에는 절대자, 이슬람교에는 알라신, 불교에는 부처, 일본의 신도에는 진자에 조상신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신(神)이란 실제는 하나님이 아닌 것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귀신이라고 말하고 신이라 칭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즉 신이 아닌 것을 신이라고 칭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 하나님은 누구신가? 라고 질문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축복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동산에서 사람과 교제하기를 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에는 그들을 심판하시지만,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메시야, 즉 구원자를 보내시어 구원해주신 분이십니다.
1.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조하시니라”(창 1:1)
이 말씀에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는 세상은 없었고, 오직 하나님만이 존재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통하여 비로소 만물이 시작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창조사역에는 사람의 창조도 포함되었음으로 사람의 기원이 하나님으로 비롯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이론들은 거짓됨을 밝히고 있습니다.
“태초에”(베레쉬트)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개시함로써 시작된 역사적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킵니다. 이는 창세기가 영원 전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주 및 인류가 탄생하는 시점으로부터 시작되는 태고사에 관한 서술임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시기 전에도 계속 존재해 오셨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엘로힘)은 '두려워하다'(알라) 혹은 '강하다'란 뜻에서 파생된 말로 곧 '두려워해야 하는 강하고 능력 있는 자', '경외해야 할 최고 존재'란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 한 분만이 두려워하고 경외해야할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합니다. ‘여호와’란 명칭이 ‘언약을 지키시는 자’, ‘택한 백성을 구속하자’란 의미로 쓰였다면(출 6:3)이 ‘엘로힘’이란 명칭은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할 때 쓰였습니다(출 20:1; 신 6:4; 삼하 22:32). ‘엘로힘’은 비록 형태는 복수형이나 실질적으로는 단수로 취급되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를 삼위이시나 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습니다(26절).
“천지”는 문자적으로는 '하늘과 땅' 곧 지구를 뜻하나 여기서는 지구를 포함하여 은하계가 자리잡고 있는 전 우주를 가리킵니다(2:1). 즉 하나님은 단지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뿐만이 아닌 전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이는 모든 만물이 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는 다윗이나 바울의 고백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창조하시니라”(바라)라는 말은 무에서 유에로의 완전한 신적 창조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순수한 의미의 창조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창조행위(바라)는 무에서 유에로의 존재 창조를 가리키는 1절, 생물에게 생명의 근원을 주시는 창조 행위를 가리키는 21절, 그전까지 전혀 없었던 영적 존재의 창조를 가리키는 27절에서만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에서 창조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날 빛을 창조하시고, 둘째 날 궁창을 창조하시고, 셋째 날 바다와 땅으로 나누시고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창조하시고, 넷째 날 궁창에 광명(해, 달, 별)을 창조하시고, 다섯째 날 궁창에 새를 바다에 물고기를 창조하시고, 여섯째 날 육축과 당에 기는 것과 땅의 짐승들 지으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기인한 단독 사역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창조능력은 제한적이거나 부차적이지 않고 완전한 무에서 유에로의 창조를 가능케 하는 새롭고 신비한 성격의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서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말씀에 의해 만드셨습니다(시33:6-9; 렘10:12). 넷째는 성경기록이 비논리적이거나 비과학적이라는 주장을 일소시켜 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6일동안 천지를 지으시고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실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27)
하나님께서 “우리”라고 표현하신 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구약적인 표현입니다. 즉 창조 사역에 나타난 각 위(位) 성부, 성자, 성령의 완벽한 협력을 나타낸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천지창조의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성령은 그 위에 운행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을 때,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 이 두 단어는 유사한 단어로서, 비슷한 말을 연속 사용하여 강조의 효과를 나타내는 히브리 수사법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분류하자면 '형상'(image)은 어떤 사물과 그것을 그린 그림이 서로 닮은 것처럼 인간과 하나님간에 찾아 볼 수 있는 구체적인 닮은꼴을 가리키며, '모양'(likeness)은 추상적인 면에 있어서의 유사성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 전인(全人)이 하나님의 성품의 영향을 받아 지음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시 8편; 겔28:12). 이러한 사실은 인간이 저급한 상태에서 고등한 상태로 진화되었다는 진화론의 허구성을 깨우쳐 주며,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하나님과의 교제 대상으로 인간만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엡 4:23, 24; 골 3:10).
다시 말하면 창조 사역의 절정은 사람(아담)의 창조요, 창조의 면류관 역시 사람입니다.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담'은 이중적인 뜻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보통명사로서 일반 사람을 가리키며, 둘째는 고유 명사로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을 가리킵니다. '아담'이란 말의 기원은 '땅'에서 유래한 것, 즉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왕같은 존재로서 지음받았음을 말씀합니다. ‘다스리게 하자’는 '주권을 잡다', '지배하다', '세력을 떨치다', '통치하다'라는 뜻, 즉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을 주관할 수 있는 권위와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고등한 존재로서 다른 피조물들에게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온 우주의 왕으로서 인간을 이 땅을 통치하는 왕의 대리자로 세우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실 때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었습니다. “여자”는 남자와 구별됨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6:19). 여기서 남자와 더불어 여성의 창조를 특별히 언급한 것은 창조시부터 남녀 간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는 남녀가 동등한 관계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육체를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령이 되게 하시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은 인간의 전인격적인 창조에 관해 기술한 1:26, 27과는 달리 본절은 특별히 인간 육신의 창조에 관해 보다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흙”은 직역하면 '땅의 티끌', 즉 '먼지'란 뜻입니다. 이처럼 인간 육신의 구성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영혼을 떠난 인간의 가치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임을 교훈해 줍니다(3:19 ; 벧전 1:24).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육체를 만드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은 생령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 생명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방법으로 부여하신 '생기'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흙으로 지어진 육체는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께서 직접 지으셨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에게 주어진 축복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영을 받은 것입니다.
“생기”(네솨마)는 '영혼'(잠 20:27), '호흡'(사 2:22), '기운'(욥33:4) 등으로도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인간의 '혼'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모든 생명체의 '기식'(氣息)을 의미합니다. “불어넣으시니”(나파흐)는 ‘숨을 내쉬다’, ‘부풀리다’, ‘불붙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육체에 생명의 근원되는 자신의 기운을 불어넣으셨다는 점에서 인간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고전 6:19).
“생령”(네페쉬 하야)은 '숨', '호흡'을 뜻하는 '네페쉬'와 '생존', '존재'를 의미하는 '하야'가 합해서 된 말로 ‘살아 있는 존재’란 뜻입니다. 생령은 사람이 육과 영이 통일된 전인격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생령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영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생령이 되게 하심으로 영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2. 인간을 축복하시고 교제하길 원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축복하시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축복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고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여기서 “정복하라”( 카바쉬)라는 말은 '발로 밟다'(미 7:19), '복종케 하다'(민32:22)란 뜻으로, 이는 땅을 자신의 것으로 취급하여 마음대로 행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선한 목적을 좇아 땅 속에 포함된 광대한 자원을 개발하며 유용하게 이용하라는 문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축복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땅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나가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교제를 위해서 에덴동산에 사람을 두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축복하시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먼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특별한 장소를 만드시고 그곳에 인간을 두시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동산이 에덴동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창 2:8)
여기서 “동산”(간)은 '울타리를 치다'(가난)에서 파생된 단어로 본래는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는 안전한 장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70인역은 이를 '낙원'(파라데이소스)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세계 여러 민족의 설화를 살펴보면 인간의 최초 거주지가 낙원이었다는 것이 의외로 많은데 이는 인류의 원조가 살던 에덴동산에 대한 변형된 전승들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동산이 에덴을 만드시고 이곳에 사람을 두심으로 당신과 교제하며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은 풍요롭고 아름다운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은 풍요롭고 아름답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이 창세기 2:9에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 2:9)
먼저 그곳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허락하셨던 최초의 양식은 동물이 아닌(9:3) 식물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때(1:29)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푼 또 다른 세심한 배려입니다. 이는 인간의 노동의 대가로 항상 풍성한 수확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죄를 지은 후 땀을 흘려 수고하여야 먹을 것을 얻는 저주와 삶과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에츠 하하임)가 있었습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전제로 인간 생명을 영속시키며 늘 강건한 힘을 공급해 주는 과실나무입니다(3:22). 생명나무에 대하여 칼빈은 주장하기를, 이 나무는 아담과 하와가 그 과실을 먹을 때마다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토록 해주는 성례전적 의미를 지닌 나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께 범죄하므로 더 이상 이 같은 하나님의 선물을 맛보지 못하는 비극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창 3:22-24).
그리고 동산 가운데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이 나무의 존재 가치는 인간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애완동물로서가 아니라 자유 의지를 소유한 전인격체로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있었습니다. 즉 이 나무는 인간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인정하고 자신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을 기억하도록 두신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과 평안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때만 얻을 수 있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10-14절에 나타나는 에덴동산의 아름다운 모습은 에덴동산이 하나님의 동산임을 상징하는 표현들입니다. 그곳은 네 개의 강이 흐르고 금과 보석이 나는 곳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보석들은 제사장들의 옷에 장식된 보석들과 유사합니다. 호노마는 대제사장의 흉배를 장식하는데 쓰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에덴동산의 동산지기로 두시고 그곳을 다스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에게 에덴동산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곳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친히 육과 영을 접목시켜 만드신 바로 '그'를 뜻하는 말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그를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신 것입니다. 여기서 ‘이끌어’(이카츠)라는 말은 ‘취하다’, ‘데리고 오다’, ‘지정해 두다’라는 의미의 말에서 기원한 말로서 ‘정신적인 지도자’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즉 단순히 육체만을 인도하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의 전인격을 붙잡으시고 당신이 지정해 두신 곳으로 친히 이끄셨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강압이나 억지에 의하지 않고 그의 자발적인 의사(물론 하나님은 이 의사에서 적극 개입하셨음)에 따랐다는 점에서 신(神). 인(人)협력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신 것은 외부의 침입이나 내부의 근심이 전혀 없이 절대 평안을 유지하는 가운데 살도록 거처를 마련해 둔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동산에서 평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사람이 에덴동산을 ‘다스리는’ 것은 그 말이 ‘일하다’, ‘경작하다’, ‘봉사하다’의 의미를 가진 ‘아바드’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아담의 평생 업이 땅을 중심한 노동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여기서 노동의 원래 목적이 생계가 아니라 자연과 세계를 관리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노동(직업)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것이란 천직 의식을 가질 때 고귀하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에덴동산을 ‘지키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이 조금의 손상도 없이 보존될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아끼지 않도록 조치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1:28에서 주어진 것과 동일한 '문화 명령'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의 권한을 위임하시고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관할토록 위탁하셨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만물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동산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만물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로서 세상을 정복하고 문화를 꽃피움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낼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동산지기로서 지켜야할 규칙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에덴동산의 동산지기로 세우시면서 한 가지를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에덴동산 중앙에 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접근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범했을 때는 생명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은 도무지 거역하거나 불순종해서는 안될 지상 명령임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임의로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정하십니다. 그것은 동산에 있는 좋은 실과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순종만 한다면 생명나무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임의로 먹다’는 문자적으로는 '먹고 싶은 대로 먹다', '자유롭게 섭취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 속에는 '생명나무'(9절)의 실과까지도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완전한 특권을 부여했음을 보여줍니다. 즉 인간에게 필요로 하는 모든 음식물이 주어졌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다음 절의 금지 조항과 조화되어 인간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모두 제공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을 때에 인간이 도무지 핑계치 못할 것, 곧 책임의 소지가 분명히 당사자에게 주어질 것을 포함하는 '자유에의 허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먹지 말라’라는 말은 ‘결코 먹어서는 안된다’는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깨닫는 바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그 '실과'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을 먹고자 하는 '의지'와 '행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순종과 불순종은 인간의 영원을 결정하는 핵심적 요소입니다(렘 7:23-28). 하나님께서 ‘네가 먹는 날에는’라고 말씀하신 것은, 명령 거부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하고도 엄정한 심판의 확실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명령을 어긴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준 절대 명령이자 인간과 맺은 최초의 행위 언약입니다. 즉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임을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 말씀에 순종하면 영원히 살리라는 약속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언약(호 6:7)입니다.
3.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타락한 인간
하나님께서 인간을 축복하시고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동산에 인간을 두시고 그곳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었는데,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습니다(창 3:1-7). 이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비극이 시작합니다. 인간은 타락하여 죄를 범했으므로 이제 하나님이 “정녕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신대로 죽게 되었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고 저주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인의 후손을 약속하신 하나님
그렇지만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심문하시고 뱀을 저주하시는 과정에서 인간에게 희망적인 약속을 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도록 유혹하였던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인의 후손이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이 ‘여인의 후손’은 장차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려고 이 땅에 메시야(구세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 때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으시도록 유대인들을 책동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인간들이 죄에서 주권을 받기 위해서 대속의 제물로 죽으신 것으로 인정하시고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어 인간을 살리십니다.
여인의 후손과 뱀이 ‘원수’가 되는 것은 여인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에 대해 사단과 그의 하수인들이 갖게 될 악감을 의미합니다(요 15:18, 19).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보다 즐거워해야 하는데 그 까닭은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우리의 상이 커지기 때문입니다(마 5:12).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여기서 ‘머리’(로쉬)는 신체상의 ‘머리’뿐 아니라(48:14; 신21:12) 지위나 장소에 있어 ‘최고 높은 것’(대하13:12 ; 애1:5)까지 뜻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뱀이 최고귀한 신체 부위인 머리를 상하게 된다는 것은 그가 도저히 회복 될 수 없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여인의 후손인 그리스도가 사단의 권세를 완전하게 꺾으실 것을 의미합니다.
뱀은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 것입니다. ‘발꿈치’(아케브)의 원뜻은 '끝부분'으로 신체 기능면에서든지, 지위면에서든지 별로 중요치 않은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이 발꿈치를 상하게 된다는 것은 그가 비록 해를 당할 것이긴 하나 그것이 치명적이지 못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사단의 궤계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3일만에 부활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일시적으로 사단의 승리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예수님의 부활로 사단과 사망의 권세는 완전히 깨뜨려집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표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인의 후손을 약속하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인간의 수치를 가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가죽옷을 지어 입히려면 동물을 죽여서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듭니다. 동물을 죽일 때 피를 흘리게 됩니다. 따라서 가죽옷은 인간의 죄를 가려주시기 위하여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대 흘릴 피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하실 때처럼 직접 옷을 만드신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시하시고 또한 영감을 주셔 그들이 옷을 만들어 입도록 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하나님께서 동물을 잡아 인간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사건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 죄를 속하기 위한 첫 번째 희생이자 구약 속죄제사의 원형입니다(레 4:13-221). 또한 이는 장차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예표하는 원시적 사건입니다(롬 3:25).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사실에 대해서 여인의 후손을 보내시어 사단의 세력을 멸망시키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표하며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하신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인류를 구원하시게 하셨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려고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동산에서 평안하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인간들이 평안을 상실했을 때,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의 백성에게 축복을 주시기를 소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축복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갈 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힘입어 죄사함의 확신과 하나님과의 화목됨을 믿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회복을 위해서 날마다 나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더욱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하여 날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살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