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십자가의 사랑
2007.4.1(주일예배)
십자가의 사랑
누가복음 23:32-43
들어가는 말
이 세상 사람들이 항상 그리워하는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버지 에 대한 추억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더 많이 갖고 있으며 어머니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합니다. 월남전 때 종군기자가 병사들의 죽음에 대하여 취재한 내용중 일부는 그들이 죽음을 맞이하며 부르는 이름이 어머니라는 말을 하면서 죽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그런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은 어머니의 자기희생적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말한다면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깊은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떠오르게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인데,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셨습니다(롬 5:8). 그 결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하는 요한복음 3장16절은 하나님의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1.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32-38절)
죄없으신 예수님은 죄인의 모습으로 두 행악자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32-33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하여 깨닫는 것은 예수님이 아무런 죄도 없으신데 행악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되 범죄한 아담을 대신하여 죽을 죄없는 인간이 필요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죄 없는 인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없는 몸으로 여인이 후손으로 오시기 위하여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땅에 오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시기 위하여 죄인의 몸으로 죽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는 예수님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두 명의 사형수와 함께 형장으로 끌려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예수님이 일반 사형수와 같이 강도나 범죄자와 동일한 취급을 당하여 처형되신 것임을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예언(눅 22:37)과 이사야 선지자의 고난의 종에 대한 예언(사 53:12)에서 언급된 예언의 성취를 확인시켜 줍니다. 이 두 행악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마태(마 27:38)와 마가(막 15:27)에 의하면 그들은 강도였다 합니다. 아마 살인과 방화 등을 서슴지 않은 흉악범(凶惡犯)이었을 것입니다. 죄인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죄인의 신분으로 죽으셔야 한 것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사 53:5).
예수님이 처형되신 사형 집행 장소가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그곳은 ‘해골이라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확한 지명은 언급되지 않고 ‘해골이라 하는 곳’이라는 불명확한 어투가 사용되어서, 이 장소가 어디를 말하는지 고증하기가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습니다. 다른 사형수와 함께 처형한 점으로 보아 로마군의 공식적 처형 장소로 보이며 성 밖의 어느 곳에 있는 무덤 근처였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지명은 해골(骸骨)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여졌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형이 해골을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분명한 점은 예루살렘 성문 밖이었다는 것입니다(히 13:12). 불가타(Vulgate)역 성경에서는 ‘해골’이라는 말을 칼바리움(Calvarium)으로 번역하여 갈보리(Calvary) 언덕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이곳을 마태와 마가는 히브리말로 ‘골고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마 27:33; 막 15:22) 누가만은 헬라어로 번역하여 ‘해골’이라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이곳은 구약성경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장소인 모리아산 자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희생양으로 삼으실 것을 결정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양 쪽에 범법자 두 명이 같이 못 박혀 있음을 말하고 마태와 마가는 ‘강도’들이 양 쪽에 못 박혀 있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마 27:38; 막 15:27).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의 좌우에 사랑하는 제자가 아닌 흉악한 강도가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예수님의 치욕스러움과 제자들의 비겁함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누가의 의도는 제자들의 비겁함이나 예수님의 치욕을 강조하기 보다는 예수님의 예언 성취(22:37)를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가 ‘강도’라는 말 대신 다소 부드러운 표현인 ‘행악자’를 사용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로마병사들은 예수님을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잔인한 처형의 방법에 따라 못 박히는 모습입니다. 누가는 못 박았다는 단순한 묘사를 하고 있지만 마태와 마가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마태는 못 박힌 시각이 제 3시경이라고 밝히는데 유월절(Passover) 다음날 오전 9시경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도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34절)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뒤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무리를 향해 측은한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34절) 이 기도문은 누가만이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마 5:44) 친히 실천하고 증명해 보이셨다는 점에서 적절한 문구로 보입니다. 여기서 용서의 대상을 지칭한 ‘저희’는 사형 집행자인 로마 군인들만이 아니라 주범인 산헤드린(Sanhedrin) 대표와 그 음모에 가담했던 모든 죄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들은 무지 가운데서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고전 2:8), ‘생명의 주’를 죽였습니다(행 3:15).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무지를 오히려 긍휼히 여기시고 그러한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회개와 죄 사함의 자리로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도 흉악한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초청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시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관원들과 군인들은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리라’하며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하고,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35-38절)
십자가 형장에서 예수님을 조롱하는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관원들과 군병들입니다. 누가는 마치 백성들은 조롱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반면 마태와 마가는 지니가는 사람도 예수를 모욕하며 조롱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누가의 의도가 넌지시 드러나는데 누가는 예수님에 대한 모욕 행위의 내용과 범위를 가능한 약화시키려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신 지도자들의 모욕 장면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하다’라는 말은 예수의 활동 가운데 치유 기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 란 십자가 처형을 바라보며 군중들이 예수님을 조롱하여 내뱉은 말이지만 실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 말입니다. 누가복음 9:35에서는 ‘택함을 받은 나의 아들’이라고 나옵니다. 본절에서 누가는 이 단어를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택하신 자’란 의미로서 사용하였다고 보여집니다. 즉 누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분으로서 세상 구원을 위한 마지막 사역을 감당하고 계셨던 사실을 기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조롱 행위는 시편 22:6-8에서 이미 예언된 바의 성취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군병들은 희롱하면서 예수님께 신포도주를 줍니다. 군병들이 희롱하면서 신 포도주를 주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희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어서 먹기 힘든 포도주를 준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하루 전날 밤부터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하신 예수님을 조롱하는 그들의 잔인성은 실로 지독하였다 할 것입니다. 또 다른 해석은 요한복음 19:28에 나와 있듯이 예수께서 '목마르다'고 하신 사실을 고려하건대 목을 축이기 위해 준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사형 집행자가 관례에 따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의무적으로 주었다는 주장도 가능합니다. 이 견해는 마취 효과를 내는 쓸개를 포도주에 탔다고 하는 마태의 기록이나(마 27:34), 시간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마시게끔 했다는 다른 두 공관복음서상의 기록 등에 의해 뒷받침 받습니다. 그러나 시편 69:21의 성취로 본다면 조롱하려는 목적이 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먹을 수 없는 것으로 주어서 고통을 가중시키고 수치스럽게 하려는 것입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모욕하기 위하여 네가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38절). 군병들의 이같은 말은, 그들이 정치적 의미에서 예수님을 희롱했다고 생각되며 그 이상의 문제에 대해서 그들은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특히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몰랐을 것이고 다만 십자가상에 붙어있는 죄명을 보고(38절)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칭왕이라고 사람들을 선동하던 사람쯤으로 생각해서 왕이면 자신을 사형으로부터 면죄 받게 하여 다시 살려보라는 투로 조롱한 듯합니다.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는 희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붙여진 것입니다. 요한복음 19:20에 의하면 명패는 3개 국어로 씌어져 있었습니다. 즉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되어 있고 또 그것을 빌라도가 직접 적은 것으로 언급됩니다(요 19:19). 이 명패는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참된 신원(identity)을 밝혀주고 있는 바, 조롱하기 위해 붙여준 이름이 결국에는 부활을 통해 예수님의 우주적 왕권을 확증하는 이름이 됩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영웅적인 왕들이 일세를 풍미하다가는 다 사라져 갔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그 절정을 보여주신 사랑으로써 오고 오는 모든 세대 모든 성도들을 통치하시는 위대한 왕이신 것입니다.
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39-43)
예수님과 함께 달린 행악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비방합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39절)
군병들의 희롱이 마치자마자 예수님의 좌우에서 못 박힌 두 죄수 중 한명이 예수님을 비방하고 있는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 죄수는 유대인으로서 종교적인 의미로 모욕하고 있습니다. 범죄자가 예수님을 비방했다는 사실이 예수님께서 당하신 치욕의 정도를 한층 더해 주고 있는데 이 범죄자가 왜 비방했는지 알 수 없으나 당시 사형을 당할 정도의 죄인이라면 셀롯당(Zealot)에 속한 무력 독립 투쟁가 중의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죄인은 예수님에게서 기대했던 혁명적 변혁이 좌절된 것에 대한 실망에서 욕을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행악자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자를 꾸짖으며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합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40-42절)
비방하는 강도에 대해서 또 다른 강도가 꾸짖습니다. 예수님을 비방하는 죄인을 향해 반박한 내용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로 미루어 보건대 이 죄수는 여호와 신앙의 전통에 익숙한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할 자가 의로운 예수님을 비방하는 것이 당치않게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서 동일한 정죄를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이 동일한 죄를 졌다는 말이 아니라, 로마 총독으로부터 받은 재판정의 판결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로움에 대해 말하기 전 이 죄인은 자신들의 형벌에 대해 마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죄인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인 듯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있게 예수님의 언행(言行)에 있어서 ‘옳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로 확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잘못을 긍정하고 예수님을 정당하게 인정하는 것을 회개의 표현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여기서의 초점은 죄인의 회개에 있지 않고 죄인에 의해서 예수님의 의로움이 증언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처형은 잘못된 것으로서 대적들의 음모와 모함에 의한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옳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은 처형대는 예수님이 계실 곳이 아니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의로움을 말한 한편 강도는 이어서 예수님께 청원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죽음을 앞둔 죄수의 고백은 매우 종교적이고 종말적인 성격을 띱니다. 특히 이 죄수는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이와 같이 소망적인 고백을 하였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를 시사합니다.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지상적(地上的)이고 정치적인 메시야(Messiah)를 기다렸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통해 그러한 기대가 무산되고 말았지만, 이 죄수는 죽음 너머에 영존할 어떤 것으로서의 메시야 왕국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당신의 나라에’라는 표현에서 죄수는 예수님 안에서 신적인 메시야상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초월적인 메시야 왕국의 도래와 ‘관련하여’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나를 생각하소서’라는 말은 ‘좋은 것을 기억하라’는 뜻으로서 너그럽게 보아 주기를 요청하는 말입니다. 이는 매우 겸허하고 소박한 요청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같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같은 큰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왕권적 권위도 강조하지만 죄인의 믿음이 빛나듯 돋보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놀라운 믿음의 통찰이야말로 43절에서 언급되는 예수님의 약속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요청한 자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43절)
자신에게 깊은 신뢰감과 믿음을 갖고 있는 죄수에게 예수님은 분명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과 함께 낙원(樂園)에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선언합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기서 언급된 ‘낙원’(파라데이소스)은 칠십인역(LXX)에서는 에덴동산을 표현 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창 2:8). 그래서 여기서 언급된 낙원은 이사야서 51:3에 나오는 미래적 에덴동산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이 약속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7에서 ‘낙원에 있는 생명 과실’은 부활 이후에 누리게 될 축복과 연관됩니다.
‘오늘’이라는 말은 구원의 즉각성과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이며(2:11; 4:21; 5:26 참고), 죄인이 죽어가는 순간에 누리고 있는 믿음의 기쁨을 강조하고, 그 기쁨이 죽음 이후에도 단절됨 없이 소유할 수 있는 것임을 확신시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한 성도는 죽어서 낙원에 들어갈 것이지만 영적으로 오늘 낙원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낙원의 삶인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앞에 살도록 성령을 의지하면서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할 것입니다.
나가는 말
우리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보여주신 두 가지 사랑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향해 조롱하는 자들을 용서하시며 성부하나님께 기도하시는 모습과 또 다른 하나는 한편 강도가 회개하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때 그를 용서하시고 낙원을 약속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은 오늘날도 동일하게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우리도 모두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즉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낙원의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구주된신 주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낙원의 삶을 살도록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 때까지 우리는 결코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날마다 십자가 앞에 엎드려서 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 가운데 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