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복음이란 무엇인가?
2006.8.20(주일예배)
복음이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5장 1-8절
I. 들어가는 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소식을 듣게 됩니다. 어떤 것은 좋은 소식, 어떤 것은 나쁜 소식입니다. 가족들의 건강과 직장에서의 승진, 사업의 성공, 자녀의 성적이 향상 되는 것 등 여러 가지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소식들은 진정한 좋은 소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소식은 육체의 좋은 소식이지만 근본적으로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소식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진정한 좋은 소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성경에서는 복음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복음이란 일반적으로 기쁜 소식을 뜻합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복된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은 무엇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 인생에 대한 문제를 말합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 중에 가장 큰 문제는 가정의 문제도 자녀의 문제도 진학의 문제도 직장의 문제도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이 모두 행복한 삶을 살고 싶지만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 불행의 시작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 원인은 죄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 죄의 문제의 해결이야말로 인생의 최대의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는지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II. 복음이란 무엇인가?
1. 하나님을 떠난 인간
(1)본래의 인간
원래 인생은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온 우주의 통치자이심과 같이 사람이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 이 땅을 다스리도록 지으셨다는 말씀입니다(창 1;26-28)
첫 사람 아담을 하나님께서 지으실 때 “흙을 빗어 육체를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창 2:7). 생령은 영과 육이 통일체를 이룬 완전한 인격을 말합니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수가 있었습니다. 육적인 생명만이 아니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시어 아담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함께 살았고(창 2:8)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말씀의 순종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6-17)고 말씀하셨습니다.
(2) 타락한 인간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로 주신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그 결과 죄가 들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거부하고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였던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죄가 된 것 입니다(창 3:1-7).
(3)모든 사람이 죄인임.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가 되어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창 3:24). 그리고 저주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혈통을 따라서 태어난 인류는 누구나 다 죄의 피를 갖고 태어나므로 모두가 죄인이 된 것입니다(로마서 5:12).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로마서 3:10, 3:23, 전도서 7:20).
만일 우리 중에 누가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요일 1: 6-10).
(4) 죄의 대가를 지불해야함.
1) 하나님과 멀어져 저주받은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여인은 해산의 고통과 남자는 가족을 위해 땀을 흘려 일해야 하는 고통을 당해야합니다.(창세기 3:16-19) 인간은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창 3;24) 인생의 저주는 하나님과 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저주입니다. 이러한 인생에게는 끊임없는 고통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인생에게 마귀가 계속하여 공격해오고 괴롭힙니다.(에베소서 2:1-3)
2)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시 50:22),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이사야 44 :18),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이사야 9 :13), 하나님이 안 계시다합니다(시 14 :1).
3) 죄의 결과 사망이 왔습니다.
먼저 영적인 사망이 오고(에베소 2 :1) 그후에 육적인 사망이 왔습니다. 영적인 사망의 결과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창세기 2:17, 로마서 6:23).
4)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브리서 9:27).
5) 심판의 결과,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야합니다(마가복음 9:47-49, 요한계시록 21:8).
2. 복음이란 구원의 소식
(1)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
1) 구원의 계획을 세우심
성부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하자 즉시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성자 하나님을 여인의 후손을 통해 이 땅에 보내시기로 하셨습니다(창세기 3:15). 이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의 만세전에 세우신 언약에 의한 것입니다. 여인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유혹해서 죄를 짓게 한 뱀(사단)의 머리를 깨뜨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하체를 부끄럽게 가리고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창 3;21). 이것은 장차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가리워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2)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여인의 후손으로 오시겠다’는 말씀(창세기 3:15)과 같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대로(이사야 7:14),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성령의 능력으로 나셨기 때문에 죄가 없습니다(마태복음1:18).
하나님의 약속대로 2천년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땅 베들레헴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30세부터 3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예루살렘 성밖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위에서 벌거벗은 채 우리의 죄와 저주를 담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우리의 죄가 없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장사한지 3일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후 40일간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3)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지만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이사야 53:5, 마태복음 1:21, 벧전 2:24).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우리의 죄와 저주를 담당하시기 위한 것입니다(갈라디아서 3:13).
(2)복음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고전 15:1,2)
여기서 "복음"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을 전파하는 "좋은 소식"을 이르는 것입니다(롬 1:2-4).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또 그 사실 위에 확립한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들이 신앙을 가졌으면, 필연적(必然的)으로 일반 신자(一般信者)들의 부활도 믿어야 됩니다. 그 이유는, 신자들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성립되기 때문입니다(요 14:19).
(3)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15:3-4).
우리 본문에 "성경대로"란 말이 두번 나옵니다. 세상 역사상(歷史上)에는 성경에 기
록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 사실들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이라고 해서 반드시 다 성경에 예언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음이 무슨 중요성(重要性)을 가집니까? 사실들이 많은 중에도, 특별히 예수님의 죽었다가 부활 하실 것은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렇게 된 이유는, 인류(특별히 하나님의 백성)가 부활함이 우주 만물의 고대(苦待)하는 바 목표이기 때문입니다(롬 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이사야 26:19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라 하였고, 다니엘 12:2엔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밖에 구약에 많은 장절들이 부활에 대하여 예언한 것이 확실합니다. 그것은, 부활 문제로 예수님께서 구약을 해석하신 것으로도 알려집니다. 그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이렇게 하셨습니다. 곧,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5-27). 부활 관계로 여기 있는 예수님의 구약 성경 취급을 보면, 구약 성경에 부활 장절이 많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무식하여 모르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가 마태복음 22:31,32에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우리로서는 부활에 대하여 가르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장절을 그는 부활 관계의 장 절로 생각하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곧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하셨다. 그는 여기서 부활 장 절 같이 보이지 않는 장 절을 부활 장 절로 취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밝히 아시고 이렇게 취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보시기엔 구약이 전체적으로(직접 혹은 간접으로)부활을 가르친다고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셨을 것은, 바울의 말로 보아도 확실합니다. 바울은 구약 성경의 목표가 부활을 가르치는데 있다는 의미로 말하였습니다(행 24:15-16, 26:22-23).
이렇게 구원사(救援史)라고 할 수 있는 구약은, 주로 부활을 내다보고 예언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부활이 우주(宇宙)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중대성을 띤 것이 저렇게 중점적(重點的)으로 예언되었으니, 우리는 믿기에 용이합니다. 우리는 믿어야 됩니다. 우리가 부활을 못 믿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부활한다면, 그것은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부활케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부활을 믿기에 문제성(問題性)을 느끼지 않습니다. 없는 데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 없으랴?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이 세상에 늘 있는 이유는, 인간된 저들의 죄악성(罪惡性) 때문입니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자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도리를 전할 때에, 믿는 자들이 생기는 반면에 믿지 않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부활 이외의 다른 교리를 전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생깁니다.
(3)부활의 증인들(5-8절)
그리스도의 부활은, 눈으로 친히 본 자들의 증거에 의하여 확증(確證)된 것입니다(고전 15:5-11).
"게바"는 다시 사신 예수와 함께 음식을 먹었다고 하면서(행 10:41), 그가 얼마나 확실성(確實性)있게 주님의 부활한 사실을 안다고 증거하였습니까? 음식을 같이 먹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 그 먹는 동안에 잘 살필 수 있으며, 또한 그 사실로 인하여 주님의 몸이 음식을 잡수실 수 있는 구체적(具體的)인 몸이었다는 것이 알려집니다.
"열두 제자"란 말은, 그들의 수효가 예수님의 부활하신 직후(直後)에도 열둘이란 의미에서 여기 관설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유다가 죽은 뒤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부활 직후엔 열한 사도만 남았었습니다. 여기서 "열둘"을 관설한 목적은, "열둘"이란 제자단(弟子團)의 명칭을 이름입니다. 한 사람이 없어졌어도 그들의 단체 이름은 그냥 "열둘"이었습니다. 이 단체는 신약 교회의 기초(基礎)로서 진리를 바로 분변할 수 있는 훈련을 3년동안 받았으며 부활 후의 예수 그리스도를 잘 식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일에 있어서 최고 권위 있는 단체였습니다. 하나님의 방침은 부활하신 주님을 누구에게나 보여주실 방침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10:40,41에 말하기를,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오백"이란 숫자(數字)는 대중(大衆)의 숫자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소수(小數)에게만 아니고 대중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소수에게만 나타나시는 불완전한 사실이 아니고 대중 앞에서도 마찬가지로 진리임을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3에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야고보는 주님의 동생이니, 그로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기의 본래 형이신 사실을 더 잘 식별(識別)할 수 있었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확실히 알았기 때문에, 후에 기둥 같이 여김이 된 일군이 되었습니다(갈 1:19,2:9).
“모든 사도에게” 여기서 "모든 사도"라고 한 것은, "열둘"이란 단체에 국한(局限)된 말이 아니겠습니다. 이것은 "사도"란 명칭을 좀 넓은 뜻으로 써서 다른 사람들, 예컨대 바나나와 같은 사람들도 포함한 말인 듯합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하던 자였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고 인격이 전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사실 증거의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원수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사실은 순 객관적 사실(純客觀的事實)인 것입니다. 그것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은 원리에 비추어 알려집니다.
(1)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실 때에 상대한 사람의 수효가 일정(一定)하지 않아서 어떤 때엔 한 사람을 상대하셨고, 어떤 때엔 십여명, 어떤 때엔 오백명까지 상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일정한 수효의 사람들에게만 보여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만큼 그의 부활 사실을 본 자들의 증거는 일방적(一方的)이 아니고 완전합니다.
(2)예수님의 부활은, 주로 그의 제자들(그의 동생 야고보도 포함됨)에게만 나타났으니, 이는, 그들만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전 예수님과 부활하신 후 예수님과의 동일성(同一性)을 식별(識別)하겠기 때문입니다.
(3)그러나 주님을 핍박하던 불신자 바울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이것도 주님의 부활의 객관적 사실됨을 확증합니다. 주님의 원수도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4)어쨌든, 주님의 부활이 무차별의 대중 상대로 나타나 보이기를 기필(期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주님의 부활 사실은 하나님이 택하신 일군들을 통해서만 증거되도록 하셨기 때문이며(행 10:41), 둘째로, 주님의 부활을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도록, 하나님께서 경륜하셨기 때문이며, 셋째로, 주님의 부활은 성령의 능력으로야 증거되며 또 믿어지는 까닭입니다(행 5:32).
5-8절에 있는 대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친히 본 자들을 들어서 그 부활의 역사성(歷史性)을 지적하였습니다.
3. 복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길
우리가 우리의 죄에서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1) 복음을 믿어야합니다.
구원받는 것(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은 복음을 믿음으로서 가능합니다(로마서 1:17).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선물로 받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에베소서 2:8).
(2)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해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 이름을 믿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습니다(요한복음 1:12).
(3)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되심을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있음을 시인함으로 구원의 자리에 확실하게 있게 됩니다(로마서 10:9-10).
III. 적용: 복음에 합당한 삶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라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합니다(빌 1:27).
1.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었기 때문에(빌 3:20),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인 '하늘의 시민답게 살아야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시민답게 사는 삶의 기준은 ‘복음’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일치하며 그 특권(特權)과 책임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늘 시민권을 갖고 살 때 성도는 부활의 생명으로 살고 성령으로 살아야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2. 성도들은 자신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다음의 두 가지를 행하여야합니다.
(1)성도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입니다(빌 1:27). '일심으로'는 이어서 '한 뜻으로'라는 표현이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 ‘인간의 영이나 마음’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즉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공동의 마음과 정신을 가지고 서로 협력하여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애써 수고할 것을 권면합니다. '복음의 신앙'은 복음 속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진리의 실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빌립보 교인들은 '진리'를 보다 널리 전하고 지키기 위해서 수고해야 합니다.
(2)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대적하는 자들'은 바울이 세운 교회에서 유대인들이 문제를 일으켰던 것들을 통해서 볼 때(행 17:5,13) 유대인들을 포함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자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주변의 많은 핍박과 거짓 교사들의 수많은 유혹 속에서 두려워하여 도망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맞서서 영적 싸움을 전개하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3.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도 받습니다(빌1:29).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과 고난을 받는 것을 내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해야 하며(요 8:30),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신 것처럼(히 2:10)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약 1:3,4; 벧전 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