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 설교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함

kaporet 2006. 3. 4. 11:01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함

골로새서 2:1-5


I. 들어가는 말


    교회안에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연약한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믿음의 성장을 위하여 힘씁니다. 그것은 자신도 연약한 시절이 있었고 자신이 성장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서 성장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성도도 자신의 힘으로 믿음이 성장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성장할 때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도와준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자신을 도와준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고백한바 있습니다. 그는 이어서 골로새교회와 라오디아교회의 성도를 위해서 자신이 얼마나 수고한지를 알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II.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기 위해


1. 성도를 위한 자신의 수고를  알기를 소원하는 사도(1절)


    사도바울은 골로새교회와 라오디아교회 그리고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성도들을 위하여 자신이 얼마나 수고하는지를 알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라오디게아'는 골로새 근처 루카스 평야에 있는 소아시아의 중요한 도시로 문화와 예술이 발달했고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도시입니다. 바울은 이 도시에 자신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4:16). 또한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라는 것은 바울이 직접 사역하지는 않았으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로서 아마도 에바브라가 사역한 히에라볼리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힘쓰는'('아고나')이라는 말은 전투적인 행위를 가리킵니다. 바울이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를 위하여 벌인 전투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혹자는 '아고나'가 순교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Lohmeyer). 둘째, 혹자는 '아고나'가 믿음과 복음을 위한 투쟁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Pfitzner). 이러한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합니다. 바울이 옥중에서 복음과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위하여 벌인 투쟁은 영적인 것으로서 중보 기도를 시사합니다. 당시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그리고 그 외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파괴하는 거짓 교훈들과 대적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비록 자신이 설립하고 전도하지 않은 교회라 할지라도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로 영적 투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도가 이처럼 골로새교회가 자신의 수고를 알기를 원한다고 말함은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애를 쓰고 있는지를 알게 됨으로 더 힘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도들이 목사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힘을 얻게 됩니다. 자신을 위하여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위로됩니다.


2. 그리스도를 깨닫기를 원함(2-4절)

    

    (1)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달음(2절)


    사도바울이 골로새교회와 라오디아교회 등을 위하여 수고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본절에서 자신의 사도적 노고가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교인들 그리고 바울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임을 밝히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바울은 거짓 교훈들과 대적하여 투쟁하고 있는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로 돕고 있음을 밝힘으로 그들을 위로하고자 합니다. ‘위안’은 슬픈 일을 당했거나 실의에 빠진 마음을 위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르지 못한 가르침에 의해 흔들리는 마음을 강하게 잡아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힘을 얻어 거짓 교훈에 잘 대적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바울이 중보 기도를 통해 영적 투쟁을 하는 목적은 그 교회의 구성원들이 사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교인들 모두가 온전히 서게 됨으로(3:14) 분열되지 않고 거짓 교훈에 강력하게 대항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여기서 ‘이해’('쉬네세오스')는 통찰력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그들이 통찰력을 가지고 거짓 교훈을 분별하여 대적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아 온전히 서게 되기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본문은 바울이 그들에게 간절히 원했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비밀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지혜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 있으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와 지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아 아는 것이 그들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임을 알리며 그것을 위해서 중보 기도를 합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깨달을 때 목회자의 마음은 기쁩니다. 성도들의 믿음의 결국은 그리스도를 깨닫고 그분 안에서 평안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서 깨달을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답게 보입니다. 목회자는 사실 성도가 그리스도를 깨닫는 일을 위하여 전심으로 힘을 쏟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2) 그리스도안에 감취인 보화(3절)


    사도바울이 그처럼 골로새교회와 라오디아교회가 그리스도를 깨닫기를 원했던 이유는 그리스도안에 보화가 감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지혜와 지식'은 같이 연결되어 나타납니다(롬 11:33;고전 12:8). 지혜는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가리키며 지식은 복음에 대한 이해를 가리킵니다.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은 자신들이 초자연적 존재들과 연결되어서 타인보다 훨씬 우월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한 거짓 교훈에 대해 바울은 모든 지혜와 지식이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진술로 반박하며(4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알 수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한편 '감취어 있느니라'는 사람이 자력으로 찾아낼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드러나게 되는 것임을 시사합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비밀이었던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들이 감추어졌으나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밝히 드러났습니다(1:27;엡 1:9).


    (3)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4절)


     사도바울이 그처럼 골로새교회가 그리스도를 깨닫기를 소원했던 이유는 그 당시 골로새교회를 공교한 말로서 어지럽히던 이단들에게 속지 아니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바울은 앞 절에서 언급한 모든 내용(1-3절)이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교인들 그리고 그 외에 그리스도인들을 속이려는 거짓 교사들을 대적하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공교한 말'은 설득하려는 말로서 '속이다'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여 그리스도를 떠나게 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궤변을 진실처럼 가장하여 현혹시키고 있었습니다.


3. 성도의 믿음의 굳은 것을 봄(5절)


    이처럼 사도바울이 골로새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수고한 것은 그러한 바울의 수고로 인해 골로새교회가 믿음의 규모가 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굳은 것을 보고 기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 너희와 함께 있어” 본절은 비록 바울 자신의 육신이 옥중에 있기 때문에 거짓 교사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골로새 교인들과 같이 있을 수 없을지라도 영적으로는 그들이 당하는 고난에 동참하며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로 애쓰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규모’('탁신')는 군대에서 군인들이 질서 정연하게 정렬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거짓된 진리로 교인들이 잘 훈련받은 군인들처럼 분열됨이나 흐트러짐 없이 강력하게 맞서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한편 '굳은 것'('스테레오 마')이라는 말은 '확고하게 만들다'를 의미하는 '스테레오오'에서 파생된 단어로 골로새 교인들이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의지하여 거짓 교사들의 유혹과 공격에도 불구하고 견실(堅實)하여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 중 소수만이 '공교한 말'에 현혹되어 그리스도를 버렸을 뿐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믿음을 견실하게 지키고 있음을 듣고 기뻐합니다.

    여기에 사도바울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교회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도 이단들의 가르침에 넘어가서 혹시라도 그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떠날까 노심초사합니다.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의 얼굴도 보질 못했지만, 에바브라를 통하여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보고를 듣고서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이 이단의 가르침에 넘어갈 우려가 있다는 말을 들을 때 사도는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이 온전한 믿음 안에 굳건히 서있을 것을 바라며 편지를 써가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마음은 언제나 성도가 믿음안에 굳건히 서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만일 한 성도라고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면 목회자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성도의 믿음이 견고하게 서있는 것을 기대하며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리고 성도가 믿음위에 굳건히 서는 것을 볼 때 기뻐합니다.


III. 적용: 그리스도를 깨닫는 삶을 위해서


    사도바울은 골로새교회의 성도가 그리스도를 깨닫기를 원했고 그들이 믿음의 굳은 것을 보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것은 주님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그리스도를 깨닫고 믿음에 굳건히 서기 위하여 어떻게 행하여야할까요?

    먼저 그리스도를 깨닫기 위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은 주님의 지혜를 받아야할 것입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본을 배워야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3:7-9에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유익한 것을 다 해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를 위하여 그리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하여 우리의 삶의 방식이 바뀌어야할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던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하여 모든 시간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자신이 지금까지 즐기던 것도, 주님을 아는 지식을 얻는 것을 먼저 한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 자신에게 귀하게 여기는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가치관은 자신과 가족이 제일 소중했지만, 이제부터는 주님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더욱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알기 위하여 성경을 더 많이 일고 묵상해야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안에 거하는 삶을 위하여(요한복음15:1-7) 경건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경건의 삶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안에 거하는 삶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때 가능합니다. 그러나 경건의 삶은 우리가 그렇게 살겠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훈련이 필요합니다. 경건한 삶을 위해서 가지치기가 필요합니다. 포도나무에 열매를 많이 맺기 위하여 가지치기를 해야 하듯이 우리가 주님안에 거하기 위하여 그래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가지치기가 필요합니다. 가지치기는 주님과의 교제에 방해되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주님을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하여 우선순위를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제는 과감하게 주님을 만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을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경건의 생활을 위하여 무엇보다 귀중한 것은 골방생활입니다. 골방생활은 주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은밀하게 시간을 보내는 장소와 시간을 말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며 주님과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우리의 경건생활에 가장 필요합니다. 경건생활이 되어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조금씩 알게 되고 좀더 가까워지고 믿음안에 서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비로소 열매를 맺어가는 삶으로 변화되어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