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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kaporet 2006. 2. 8. 13:10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롬2:17-29


롬 2:17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롬 2: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롬 2: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롬 2:20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롬 2: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롬 2: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롬 2: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롬 2: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롬 2:25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롬 2: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것이 아니냐

롬 2: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롬 2:28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롬 2: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I.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인들 중에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씀을 잘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신앙이 매우 좋은 줄 압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엉망이라면 그 사람의 성경에 관한 지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성경을 잘 안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드는 사람이 자신은 그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분명히 그 사람을 비난하면서 “너나 잘 믿어라”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방인을 판단하였지만, 과연 그들의 판단이 옳은가에 대하여 이의를 제한 바 있습니다. 이방인이 율법이 없어도 양심에 따라 율법을 행하였다면, 율법을 가지고도 행하지 못한 유대인은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판단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은 이어서 율법을 가지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진정한 유대인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율법을 가지고 자랑만 하는 자인가, 율법을 행하는 자인가, 만일 율법을 가지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율법이 없는 이방인과 조금도 다름이 없지 않는가라고 묻습니다.


II. 진정한 유대인이 누구냐


1. 율법을 자랑하는 자(17-20)


    (1)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는 자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라는 말의 의미는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인'은 '히브리인'이나 '이스라엘인'이라는 용어와 구별됩니다. 히브리인이라는 호칭은 언어 군(群)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고, 이스라엘인이라는 호칭은 구속사적인 개념을 강조하는데, 유대인이라는 호칭은 헬라인이나 이방인들과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모세 율법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 공동체로서의 특성을 반영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부여받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특권을 자랑할 뿐 아니라 그 특권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경멸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우월감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순종함으로 나타났으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들은 특권만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에 따르는 책임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에 걸맞는 거룩한 백성으로서의(출 19:6) 특권을 유지하려면 '언약을 지켜야 할'(출 19:5) 책임이 있음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내세웠으나 실상은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면서 그들이 부여받은 특권만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은 세례 요한의 책망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마 3:9).


    (2)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는 자

    본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서 얻게 된 유익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안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해 주셔야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서 여러 모양으로 계시하셨기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구체적으로 '구원 계시'를 가리키지만 좀더 폭넓게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용어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 계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계시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이 요청됩니다.

    유대인들은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었습니다.  본 구절에 대해서는 해석자들마다 약간씩 견해가 다릅니다. 예를 들어 틴델(Tyndale)은 '선악에 대한 경험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며, 모펫(Moffat)은 '종교에 있어서 생동력있는 것에 대한 의식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또한 영역 성경중에서 이 구절을 '도덕적인 구분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NEB). 이러한 해석상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칼빈(Calvin)은 선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선악을 구별하는 것을 동시에 인정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메튜 헨리(Mattew Henry)같은 주석가도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본문이 뜻하는 바는 칼빈의 첫번째 견해에 더 접근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절은 유대인들이 단순히 선악간에 판단한다기 보다는 율법의 선한 교훈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 선한 것을 인정한다는 사실은 그 선을 옳은 원리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율법에 따르는 선한 삶을 살 지 않은 어리석음을 저질렀습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한'(1:21) 이방인들의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입니다.


    (3)소경의 길로 인도하는 자

    1)유대인들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입니다.

    본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을 직역하면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양을 가지고서'가 됩니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이유를 나타내는 분사 구문으로 이해하여 '지식과 진리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므로'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규모'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르포시스'는 '모양'이나 '외모'를 뜻하지만 외적인 모양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참된 표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모르포시스'를 '본질'(휘포스타시스)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Black).  본문에서는 유대인이 율법을 통해 가진 지식이나 진리가 거짓되다든지 알맹이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한 참된 지식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식을 좇지 않고 자기 임의대로 행하는 것을 책망하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2)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

    성경에서 소경과 어두움에 있는 자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눈이 먼 상태에 있다는 것은 어둠 가운데서 헤매이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사 42:19;56:10;마 6:23;요 1:5;고후 4:4;요일 2:11). 여기서도 바울은 역시 중복어법을 사용하여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내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편 '어두움에 있는 자들의 빛'이라는 표현은 이방인을 향한 유대인들의 사명을 시사합니다. 유대인들은 토라를 자기의 등불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토라를 소유한 자신들이 이방인들에게 등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명마저도 자신들의 특권을 자랑하는 도구로 삼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주의 말씀은 내발에 등'이라고(시 169:105) 고백하면서 빛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유대인들처럼 말씀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자랑하려 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4)어리석은 자의 선생

    1)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

    영적으로 '어리석은 자'와 '어린아이'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영적인 의미에서 상징하는 바가 '연약한 존재'(고전 14:20;엡 4:14) 또는 '어리석은 존재'(잠 22:15)로 나타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본 구절도 앞절과 마찬가지로 중복어법에 의한 강조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한편 '훈도'란 용어는 헬라어 '파이듀테스'로 보통 '선생'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디다스칼로스'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만, 좁은 의미에서 '파이듀테스'는 잘못을 범할 때 채찍질도 가하는 '엄한 선생'을 가리킵니다.

    2)스스로 믿으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잘못은 특권을 부여받은 자들이라는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도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갈 6:3, 4) 본절과 같이 행함 없는 자랑을 위선이라고 폭로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갖지 못한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특권으로 말미암아 더 큰 행악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신념을 신뢰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패한 인간의 도덕적 무능력에 지나친 기대를 가짐으로 인하여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가운데서 자신을 속이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또한 율법주의자들은 그 이웃들에게 자신도 질 수 없는 무거운 짐들을 지우는 반율법적인 잘못을 범하였으며, 더 나아가 그들의 신념은 자신을 속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결과를 초래함으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본장의 뒷부분에서 사도는 보다 더 면밀하게 유대인에 대해 강론하는 가운데 그들의 주장과 허세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죄악이 무엇인가를 들춰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먼저(13절)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실천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는 이 위대한 진리를 여기서 유대인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2.율법을 범하는 자(21-24)


    (1) 자신을 가르치지 않는 자

    1)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이 질문은 유대인들 의 형식적인 삶에 대하여 다음에 계속되는 네 가지 질문을 유도하기 위한 대표적인 의문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유대 랍비들의 문헌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습니다(Hendriksen).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들만이 율법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진리를 알고 있다고 자부했고(요 9:34), 이 점은 주님께서도 인정해 주신 바 있습니다(마 23:3).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자기들이 가르치는 바를 자신들은 지키지 않으면서 의로운 체 하는 그들의 외식이었습니다(마 23:23-28). 이러한 의미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여호와 신앙을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시킨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행동으로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처럼 나타내 보이지만, 실상 그들의 심령은 전혀 하나님과 무관하며 단순히 형식적이고 외면적인 종교 지도자에 불과했습니다.

    

    (2)가르치는대로 행하지 않는 자

    1)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간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이큐오'는 히브리적 표현에서 '영적 간음'이나 '우상 숭배'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계 2:22) 본절에서는 우상 숭배를 따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적 간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의도적이며 구체적인 사실을 선명하게 표현하면서 그들 가운데서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온갖 음행과 간통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가장 엄격한 율법을 종교의 원리로 삼고 있었지만, 그들의 도덕적 기준은 여전히 부패한 인간 본성의 심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2)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앞에서 언급된 '도적질'과 '간음'이란 용어를 비추어 볼 때 바울은 십계명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십계명에 따라 우상을 가증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나 우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을 탐내어 도적질했습니다. 신사(神社) 물건을 도적질 한 것이 악행인가에 대해서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지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본절에서 바울은 그러한 행위가 죄인지 죄가 아닌지에 대해서 논하고자 이 질문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가증스러이 여기는 우상 제물을 탐낸, 우상 숭배 이상의 죄악을 폭로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에서는 이 문제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면서 그 행위가 죄가 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즉 신명기는 우상들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어 취하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그 금지의 이유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일로 인해 올무에 빠질 것이 염려되기 때문인 것을 들고 있습니다(신 7:25).


    (3)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자

    1)학자들 사이에는 본절을 의문문으로 해석하느냐 평서문으로 해석하느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합니다. 24절의 접속사 '가르'는 21절에서 23절까지에 언급된 다섯 가지 질문을 하게 된 근거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본절은 내용상 앞에서 언급된 네 가지 질문의 형식과 잘 부합될 뿐 아니라 특히 21절에 언급된 첫 번째 질문을 보다 구체화시켜 대비적으로 표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나머지 세 가지 질문을 요약한 질문도 됩니다. 따라서 본절은 의문문으로 해석하는 편이 본문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됩니다.

    2)율법을 범함으로

    이 말은 유대인들이 범한 잘못들(22, 23절)이 곧 율법을 범한 행위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1절에서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는 질문의 내용이 율법을 범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것임도 본절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4)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음

    1)기록된 바와 같이

    이 표현은 본절이 사 52:5의 인용구임을 시사해 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권위를 내세우는 동시에 자신의 논리를 더욱 확고히 정당화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바울이 이사야 선지자의 직접적인 선포를 간접적인 내용으로 변형시켰으나 내용상으로는 동일한 의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2)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당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마치 하나님과 동일한 인격을 소유한 거룩한 백성인 양 취급했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그들의 삶이 고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지나친 자랑에 이방인들이 속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바울이 고발한 것과 같은 유대인의 범죄함을 발견 한다면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도구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자들임을 바울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3.무할례자의 율법을 지킴(25-27)


    (1)할례의 유익

    1)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바울은 유대인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율법과 함께 또 다른 자랑거리인 할례의 문제로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자신이 의도한 복음의 본질에 한 걸음 더 접근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시키는 유일한 기준은 율법이지만 표식은 할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까지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들어 논리를 전개해 왔지만, 이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자랑거리요 표식인 할례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더욱더 유대인들이 변명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 있을 때 유대인들의 할례가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형식적인 할례 의식에 그치며 이는 그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신적인 힘을 상실케 하고 맙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고 경고했던 것입니다.

    2)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유대인들은 할례 자체가 의의 조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실제로 유대교의 전승에 따르면 '게헨나(지옥) 문 옆에 앉았을지라도 할례받은 사람은 아무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아브라함이 책임을 져 준다'는 내용의 교훈이 있습니다(Harrison). 이와 같이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할례가 다른 어떤 의식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형식적인 유대인들의 할례는 무할례와 같다고 선포한 것은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선포로 인해 유대인의 자랑은 쓸모없는 것으로 변하게 되며 형식적인 신앙에서 실제적인 신앙으로의 결단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4.진정한 유대인이 누구냐(28-29)


    (1)진정한 할례, 진정한 유대인(28- 29절)

    1)"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식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이것은 외적인 규칙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 자체로서는 하나도 나쁠 게 없는 것들입니다. 여기서 뜻하는 것은 이것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 가는 데 충분한 것으로 알고 그것만 붙잡고 늘어지며 의지하는, 그리고 그대로 산다는 이름만 가졌지 실제 생활은 동떨어진 삶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은 하나님에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인정을 받지도 못하며 율법의 의도를 따른 것으로 쳐 주지도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요 8:39, 40).

    2)"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보시는 것은 마음이요, 우리가 그에게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것은 마음의 할례입니다(신 30:6 참조). 이것이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이니(골 2:11, 12) 곧 "육적(죄의, 흠정역) 몸을 벗는 것"입니다. 따라서 할례는 우리의 주체인 영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그것도 그 할례의 창시자인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칭찬은 겉모양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에게서가 아니오 다만 하나님에게서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손수 이 성실을 인정하고 거기에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럴 듯한 핑계와 수작이 인간을 속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겉모양을 꿰뚫고 실상을 보시는 하나님께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표면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세례가 세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며, 세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입니다.



III. 적용: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자랑하면서 지키지 않고 할례를 자랑하나 하나님 백성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한 나라의 국민이 그 나라의 법을 지키지 않고 그 나라의 국민된 것만 자랑한다면 결국 그 나라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던 유대인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상징으로서의 할례를 받고 율법을 소유하였으나 하나님 백성으로서 율법을 지킬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삶은 이방인의 삶보다 못한 면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고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도 세례를 받은 사실도 그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질 못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삶을 살려면 어떠한 삶을 살아야할지 묵상하길 원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서 구원의 확신 속에 살고 있는지 살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세례를 받은 자가 아니라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확신이 있는 자가 들어갑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기막힌 봉사와 사역을 했어도 믿음이 없으면 그의 봉사와 사역은 그리스도안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둘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자신의 옛자아가 죽은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이 좋다는 평판을 듣는다 해도 우리 안에 옛모습이 나타나면 결국 우리는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옛자아가 나타나는 한 우리안에 주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나기는 힘듭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모습이 나타나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옛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확인하기에 힘써야할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임재 앞에 살아야할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항상 주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는 것을 의식하며 사는 삶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자신이 사는 것은 자신이 아니요 주님이 사신다고 고백하는 삶이 되어야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주님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주님의 마음으로 행하는 삶이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삶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람의 칭찬을 구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칭찬을 구하며 삽니다. 그럴 때 우리는 모든 일에 보다 초연하게 살게 되며 주님의 상급만을 바라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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