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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믿음의 손을 내밀어

kaporet 2009. 6. 20. 17:29

믿음의 손을 내밀어

마가복음 5:25-34

2009.6.14(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현대인들이 좋아하는 공통적인 단어는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상업광고의 주된 표현도 행복에 대한 이미지를 부각시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을 원하지만 오히려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우리 인생에 대하여 말하기를 고난의 세월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도 야곱이 애굽의 바로왕 앞에 섰을 때 그의 나이를 물어보니 자신의 나이가 130세이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하는 것은 고난의 세월을 보내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소원하여 아버지 이삭을 속이며 축복기도를 받았지만, 그는 자신이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평안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고난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고난이 때로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경우를 성경에서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는 고난 중에 있던 한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서 고난으로부터 해방되고 구원을 받고 평안을 얻는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1. 고난에서 벗어나려는 여인


    고난의 세월을 지나온 여인


    오늘의 이야기는 회당장 야이로가 자신의 딸이 병들어 죽게 되어 예수님을 모시고 자기 집으로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 여인은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을 당하였다고 소개됩니다. 여기서 혈루증은 현대의학 용어인 “혈루병”은 아닙니다. 혈루병은 여자에게 유전 인자로 잠재할 수는 있어도 병으로 나타나지 않고, 다만 남자에게는 유전으로 잠재성과 병으로 모두 나타납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혈루증은 만성 하혈증(下血症)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자궁 안에 종기가 생기거나 어떤 이상이 생겨 불규칙적으로 피가 흐르는 증세일 것으로 간주했습니다(레 15:25). 따라서 이런 병에 걸리면 종교 생활 뿐 아니라 사회적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몸에서 출혈이 있는 여인이 만지는 어떤 것도 부정한 것이 되고 그녀가 앉는 자리나 잠자는 자리나 모두 부정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가족들조차도 그녀와 함께 살 수가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12년동안 그녀는 가족들과도 자유롭게 만나서 이야기를 할 수 없고 친구들도 다 멀리 떠나서, 그녀는 고독가운데 혼자서 투병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혈루증 여인에게 있어서 혈루증은 단순한 육체의 고통만을 준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혈루증으로 인해 가족들과 헤어져 홀로 살아야하는 고통이 무엇보다 심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사는 행복조차도 그녀에게 용납되지 않은 것이 고통이었습니다. 이전에는 몰랐지만 건강한 몸으로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인가 하는 것을 새삼 깊이 느꼈습니다. 건강할 때 그런 행복을 누리를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치 못하고 살았던 자신의 모습이 후회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병이 12년이나 된 병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병이 치유될 수 없는 불치의 병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여인이 병으로 받는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처참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녀는 혈루증을 치료받기 전에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었습니다.


    모든 수고가 헛되게 됨


    그러므로 혈루증을 앓는 이 여인은 자신의 병을 치료받기 위해서 많은 의사를 찾아다니며 치료를 위한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 의원들은 그녀에게 더 심한 고통만을 안겨 주었습니다. 즉 의학적 치료행위가 병을 치료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녀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이 여인의 가정은 어느 정도 부자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부자가 아니면 의사를 찾아 갈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많은 재산을 치료비로 다 써버리고 이제는 가난한 처지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병은 더 악화되었다’는 묘사는 25절에서 12년 동안 병을 앓아왔다는 표현과 함께 병의 불치성과 의술의 무력함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모든 수고가 허사로 돌아갔다는 절망적인 상황을 말하며, 그 여인이 받고 있는 고통이 진퇴양난의 절박한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재산을 치료비로 다 허비하고 남은 것은 병든 몸 하나이고 그나마 병은 더욱 악화되고 병의 부정함 때문에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여인의 모습은(레 15:25-28) 인간 최악의 한계 상황에 다다른 것입니다. 삶과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상실되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이 여인의 모습은 죽음 직전에 이른 야이로의 딸과 함께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인간의 유한성과 인간적인 노력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 혈루증의 여인은 더 이상 자기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혈루증 여인의 모습은 어쩌면 하나님을 떠난 현대인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위해서 열심히 살고 있지만, 열심히 수고하면 할수록 여러 가지 일로 고통을 당합니다. 부를 누리기 위해서 열심히 돈을 벌려고 하지만 돈을 버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당하고 고통을 당합니다. 돈을 벌어도 그것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행복을 위해서 돈을 벌지만 함께 지내야할 가족들과 대화할 시간을 잃어버리고 사실상 고독가운데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대화의 단절, 부부간의 대화의 단절, 형제간의 대화의 단절로 고통합니다. 때로는 질병의 고통으로 여인처럼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을 하면 할수록 더 힘든 상황이 전개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노력으로 어찌하든 고통의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그것은 헛수고입니다. 그러므로 절망적인 자리에서 벗어나는 길은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뿐입니다.


2. 믿음의 손을 내밀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댐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절망의 벽에 부딪힌 이 여인은 예수님의 병을 치유하는 기적에 대한 소문을 상세하게 들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도 자신의 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23절에 언급된 야이로 회당장의 진술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야이로의 믿음처럼 예수님께서 주체가 되어 환자와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환자가 예수님께 접촉을 함으로써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한 것은 예수님에게 치유의 능력이 충만하다는 확신에 찬 믿음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여인의 믿음이 얼마나 절실했는가라는 것 입니다. 더욱이 이 여인은 직접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소문을 통하여 믿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그녀는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예수님을 만지게 되는데, 이 같은 사실은 그녀의 담대함(간절함)과 겸손함을 대변해 주는 행동입니다. 즉 그녀는 사회 통념상 여자로서 뿐 아니라 부정한 자로서 공중(公衆) 앞에 나설 수 없는 입장이었으나 그러한 사회, 종교적 장애를 극복하고 담대히 예수님께 접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몰래 감추고 자신의 병을 가만히 치유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예수님의 "뒤로" 온 것입니다. 즉 그녀는 예수님과 접촉함으로써 율법적으로는 예수님을 부정케 만든 결과가 되었습니다(레 15:19-27). 그러나 생명의 주께서는 이 모든 의식적 부정을 초월(超越)하여 그녀의 믿음을 받아 들이셨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옷을 만지게 된 것은 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만 해도 구원을 얻을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녀는 예수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혈루증이 나은 여인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진 결과 그녀의 병은 즉각적으로 치료되었습니다. 실로 12년 동안 한시도 그녀의 몸에서 출혈(出血)이 떠나지 않은 그 지독한 병증이 완전히 제거된 것입니다. 특히 “혈루의 근원이 곧 마르매”라는 표현은 병의 치료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치료된 것을 암시합니다. 이로써 그녀는 12년 동안의 정신적 고통이 함께 해결된 것입니다. 이러한 치료는 예수님과의 전인격적(全人格的) 접촉(교제)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결 방법이라는 사실과 동시에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를 더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병이 나았다는 것을 직접 알게 되었습니다. 즉 그녀는 혈루의 근원이 근절되자 곧 자신의 치유를 스스로 느끼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 같은 자각은 곧 그 치유가 몸으로 직접 느낄 정도로 완전하고도 신속하게 치유되었음을 말합니다. 간청을 한 적도 없고 믿음을 예수님께 밝힌 적도 없는 이 여인에게 기적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이 여인이 갖고 있는 믿음이 공개된 사실은 없지만 이미 숨겨진 믿음도 기적을 일으킬 만한 가치가 있음을 암시합니다(히 11:6). 실로 예수님은 인간의 심령을 살피는 분으로서 그 소원의 깊이를 조용히 알아보고 계셨던 것입니다(마 6:6).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아무리 심하다고 해도 우리가 믿음의 손을 예수님께 내밀기만 하면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를 고통에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옷을 만진 여인처럼, 우리도 믿음의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몸을 만져야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은 예수님 안에 충만한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기만하면 자기 병이 나을 줄 믿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의 능력이 충만히 나타날 것을 믿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지금은 예수님이 하늘에 계시므로 우리가 직접 예수님의 몸을 만지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몸된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예배하면 영적으로 예수님을 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 예수님께 구하기만 하면 예수님이 다 들어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기도하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응답될 것입니다.  


3. 구원을 선언하시는 예수님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을 아신 예수님


    여인이 자신의 몸이 나았다고 느낀 순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서 치유의 능력이 나간 사실과 누가 자신의 옷에 손을 댄 사실을 감지하셨습니다. 사실 그 치료받은 여인은 모든 것을 은밀히, 조용히 심지어 예수님마저 모르게 해결하고자(27절) 했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 같은 그녀의 생각은 심히 어리석은 것이었지만 그녀의 겸손하고도 조용한 일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사람들이 혼잡한 가운데서도(31절) 당신의 전지성(全知性)으로써 그녀의 간절한 소망을 이미 알고 계셨고 또 그녀가 당신의 옷자락을 만지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당신이 친히 그녀의 소망을 들어 주셔서 그녀의 치유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스스로 아시고”라는 말은 완전하고도 초월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말은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행위의 동기와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고 계셨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같은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셨기 때문에 이 질문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내밀한 이적을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하시기 위해 이 같은 질문을 의도적으로 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치료받은 사람과 인격적(人格的)인 관계를 갖기 위함인 것으로도 보입니다. 병의 치료는 단순히 물리적인 치료만이 완전 치유가 아닙니다. 병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 역시 신체적 고통 못지않게 큰 것이므로 인격적 만남 속에 병이 치유되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녀가 그녀의 병을 고침받은 것이 미신적 신앙 때문에서가 아니라 진정한 신앙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그녀가 손으로 당신의 옷자락만 잡기보다 그 영(靈)으로 당신의 거룩한 인격을 잡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이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손을 댄 사람을 찾으시는 것에 대하여 불만 섞인 응답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혼잡하고, 또 사람들이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옷에 손을 대었는지 어떻게 알겠느냐는 식의 반문입니다. 이것은 혈루증을 치유한 사실이 예수님과 환자 자신밖에 모른다는 사실과 제자들의 영적 무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고백하는 여인


    예수님께서는 바로 군중들을 향해 몸을 돌리고 직접 찾으십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여인은 더 이상 사실을 숨긴 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몹시 두려워하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을 고백합니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여인을 찾으시는 행위입니다. 제자들의 퉁명스런 변명에도 불구하고 계속 치유된 여인을 찾고 있는 장면("둘러보시니")은 치유받은 자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기 위함도 아니고 치유를 확인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오직 치유받은 사람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그녀로 하여금 바른 신앙을 갖게끔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고통당하는 사람에 대한 강한 관심과 뜨거운 사랑 및 다함없는 연민을 갖고 있음이 암시됩니다. 둘째는 치유받은 여인의 행위입니다. 그녀는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의 병이 종교적으로 부정한 것이고 따라서 죄인 취급받는 신분이기 때문에 군중들 틈에 끼여들였다는 것을 공개하기에는 두려운 사실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런 부정한 몸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다는 사실이 특히 여자의 신분으로서 불경건한 행위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그녀는 자신이 지금 받은 은혜를 예수님으로부터 훔쳐 낸 것 같은 심령을 가졌을 것입니다. 즉 그녀는 예수님 몰래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이용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에 대한 깊은 경외감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 엎드린 모습은 예수님께 대한 경외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치유의 기적을 체험한 이 여인이 예수님에 대하여 신적인 권위와 초월적인 능력을 느꼈을 것이고 따라서 그에 따른 경외감이 두려움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강권적인 요구로 자신의 만성적인 몹쓸 질병과 그 기적적 치유에 대한 모든 사연들을 무리들 앞에서 공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소위 신앙 간증으로서,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크나큰 은혜에 부응하여 그분께 무한한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었으며, 또 그녀가 완전한 정상인이 되었음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일이 되기도 했습니다. 실로 "은혜 위에 은혜"의 역사가 주어진 것입니다.


    구원을 선언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혈루증을 치유받은 여인이 당신 앞에 나아와 모든 것을 고백하자, 그녀에게 공개적으로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여기서 “딸아”라는 말은 성숙한 여자나 소녀를 향하여 애정어린 마음으로 친밀히 부르는 호칭으로서(23절) 예수님께서 여인을 향하여 친히 이렇게 말씀하신 곳은 복음서 가운데 본문이 유일합니다. 실로 예수님께서는 그녀로 하여금 그녀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기 때문에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지닌 “믿음” 때문에 완전한 회복(구원)을 얻은 것임을 주지시키셨습니다. 그 “믿음”은 그녀가 예수님에게 치유의 능력이 충만함을 확신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행위로 옮겼을 때 이 여인의 가장 절망적 문제였던 혈루증이 완전히 치유된 것입니다.

    “구원하였으니”라는 말은 그 구원이 이미 그녀에게 확실히 주어졌음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 구원은 현상적으로는 육체적 구원과 영적 구원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묘사되고 있습니다(2:1-12). 따라서 이 치유의 체험은 질병으로 인한 모든 육체적 고통과 자신이 부정한 죄인이라는 정신적. 영적 굴레로부터 벗어남을 뜻합니다. 이와 같은 구원 선언을 예수님께서는 군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이 여인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님을 선언하고 있으며, 아울러 예수님은 이 여인을 소외당했던 사회로 다시 복귀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자유와 회복을 허락하시려고 그 여인을 그렇게 찾았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또한 부정한 여인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구원은 죄의식으로부터 풀려나는 것뿐만 아니라 건강과 평화로운 사회 공동체에 복귀하여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구원 선언을 한 다음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감동적인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평안히 가라"는 문자적로 "평화의 상태를 지니고 가라"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평화의 은총을 선사하신 것입니다. 이 평안은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인사말인 "샬롬"(삿 18:6 ; 삼상 1:17)을 훨씬 능가하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공하신 것입니다(요 14:27). 평안은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질 때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녀의 모든 죄가 다 사하여졌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고 선언하신 결과에 대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 구원의 선언을 듣고 평안의 축복을 받은 여인은 더 이상 고통 속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녀는 이제부터 병의 고통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사실 여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이와 같이 평화로운 은총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는 것이 주님의 뜻일 것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도 우리 중에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나 가족의 문제나 육신의 질병의 문제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해 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12년동안 혈루병으로 고통당하던 여인처럼 애를 써도 고통만 더할 뿐이지 해결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심정으로 우리의 문제를 예수님께 구하기만 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기억하며 믿음의 손을 내밀며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봅시다. 이 시간 예수님 앞에 다 내려놓고 예수님께 문제 해결을 요청합시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 문제의 해결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센다바중앙교회
글쓴이 : kapore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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