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 설교

[스크랩]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자

kaporet 2008. 3. 30. 14:57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자

에베소서 4:1-6

2008.3.30(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어떤 고아원에 한 신분이 높은 사람이 방문했습니다. 평소에 그 고아원에 많은 기부금을 준 사람이므로 고아원 원장을 비롯하여 전직원이 아이들을 모으고 정렬시켰습니다. 신분이 높은 그 사람이 방문한 목적은 아이들의 모습을 보러 온 것보다 사실은 그 이아들 중에 누군가를 데려가기 위하여 온 것입니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 중에 한 아이를 데려다가 자기의 자녀로서 키우기 위한 것입니다. 많은 아이들 중에 가장 어리고 수줍을 잘 타는 여자아이를 택하여 자기의 집으로 데려갑니다. 고아원 원장과 교사들은 그 아이에게 잘되었다고 말하며 이제 그분이 아빠니까 그분의 말을 잘 듣고 예쁘게 크라고 격려를 해줍니다. 그 아이는 그 날부터 신분이 높은 사람의 딸로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자신의 양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이 있었던 고아원만을 그리워한다면 얼마나 안타가운 일이겠습니까? 이제는 부모가 생겨서 가정의 행복을 맛보며 살게 되었는데 옛날을 그리워한다면 새 부모의 사랑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부르심의 부름에 합당하게 살라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1절)


    하나님의 부르심의 부름에 합당하게 살아야할 성도


    우리는 고아와 같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우리의 죄로 마땅히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에 처해져야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신 성도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을 강건케 하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알게 하시고, 그 사랑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도들에게 ‘너희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고아원에서 양부모에 의해 입양된 아이가 양부모의 말에 순종하며 양부모의 자녀로서 살아야하는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자신을 부르신 것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합니다. 여기서 '합당하게'라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어떤 기준을 세워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 기준은 ‘부르심’으로서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을 통한 새 생명에의 초대입니다(1:4, 5, 12, 13). 그러므로 새생명으로 초대받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부합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가 신앙의 고백과 실천 사이에 항상 평형(平衡)이 유지해야 함을 말씀합니다(마 3:8;10:38; 행 26:20; 빌 1:27; 골 1:10).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은 우리로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빛을 온전히 나타내지 못하는 이유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교회생활에 충실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거룩한 삶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서로 사랑하며 또한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부르심의 부름에 합당하게 사는 삶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2-6절)


    서로 용납하라


    성도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부름에 합당하게 살아야할 것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도는 첫째로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자신의 부족과 무가치함을 깨닫고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자세입니다(빌 2:3).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항상 겸손해야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친히 낮아지시는 모범을 통해 겸손의 미덕을 보여주셨기 때문에(빌 2:6-11; 벧전 5:5) 우리도 겸손해야합니다. 겸손한 자만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관용하고 용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온유’해야 합니다. 온유는 '이해심 깊음'이라는 말로서 '정중함'(gentleness)을 말합니다. 온유의 미덕은 그리스도의 성품이며(고후 10:1) 성령의 열매로서(갈 5:22, 23)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중용'(中庸)을 뜻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음을 의미할 때 사용됩니다. 둘째는 자신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본능적인 욕구 등을 스스로 자제하는 덕성을 의미합니다(약 3:3-8). 우리는 때때로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 때문에 분노합니다. 이것은 온유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는 것’은 죄인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며(롬 2:4;9:22; 벧전 3:20; 벧후 3:15) 그리스도인들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내야 할 성령의 열매로서(고전 13:4; 고후 6:6; 갈 5:22; 골 3:12), 복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복수하지 않는 정신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조금만 해를 끼쳐도 그 사람을 원망하고 비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잘 못을 해도 끝없이 오래 참고 용서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오래 참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래 참는 자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고 상대방을 용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사랑'입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성령에 의해 공급되어지는(롬 5:5) 새 시대의 능력으로(고전 13장; 갈 5:14, 22), 어떤 보상이나 조건을 내걸지 않은 자기희생적인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는 것은 상대방의 연약함과 결점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내게 잘 맞지 않아도 상대방을 용납해야하는 것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듯이 그 사람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받아주시고 용납하셨듯이 우리 또한 형제의 연약함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일 것입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라


    이와 같이 성도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기위해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삶이 이루어 질 때 성령께서 성도를 하나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때 성도는 서로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합니다. 성도의 일치의 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수단은 ‘평안의 매는 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원수된 관계를 화해시키고,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화해를 이루셨으며(2:14-18),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 됨'을 유지(維持)하도록 하기 위해서 평안과 화해의 대리자라는 직분을 주셨습니다(고후 5:18). 이러한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치가 분열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매는 줄'은 성도들을 서로 묶어 주는 사랑을 상징적으로 표현한(골 3:14) 것으로 족쇄보다 강한 결속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성도의 일치됨은 궁극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힘써 지키라'는 말은 '노력하다'보다 강한 표현으로서 어떤 목적을 향한 진지하고 열심있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평안을 통해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 매우 급박한 것이며 단호한 결심이 뒤따라야 하는 어려운 일임을 나타냅니다.

    이는 성도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써야하는지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만 하면 성령께서 다 해주실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은 우리의 순종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성도 각 지체가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의 일치를 이루시려는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는 꼴이 됩니다. 그 결과 성령께서 원하시는 방향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서 지켜야할 이유(1)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할 이유는 몸이 하나이고 성령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몸이 하나’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한 몸'을 의미하며, '한 몸'은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를 뜻합니다(1:23; 2:14-22). 이러한 '한 몸'은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온전히 하나로 묶여진 유기체로서 통일성을 이룹니다(고전 6:15;10:17; 골 1:18). 그러므로 하나 되게 하는 일에 힘써야합니다.

    ‘성령이 하나’라는 말은, 한 성령으로 한 공동체를 이룬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의 성령을 영접하였다고 선언합니다(1:13, 14).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 사이의 공통적 근거로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의 유기체적인 통일성을 이루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처럼 성도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야하는 것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특별한 소망을 위해서 부르셨는데 여기서 '한 소망'은 '우주적 통일성'에 관한 소망을 가리킵니다(1:9, 10). 이 '우주적 통일성'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하신 구원의 목적으로서 이에 대한 소망은 교회를 통일시키고 화해를 이루게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살게 되는 축복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누구나 부르심의 한 소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 안에서의 일치를 위해 힘을 써야합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할 이유(2)


    성도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할 이유는 성령과 함께 ‘주도 하나이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성령을 받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함으로 구원함을 얻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물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으로 하나 된 것처럼 그들의 주도 하나이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인 것입니다.

    ‘주도 하나’라는 말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으로(롬 10:9;14:8, 9; 고전 8:6;12:3; 빌 2:9-11)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주를 따르며 복종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인도하에 있으므로 통일성을 이루는 것이 마땅합니다. ‘믿음’은 개인적인 면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따라 충성하며 자신의 삶 전체를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각의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은 동일한 것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되어 있다고 하는 외적인 표적으로 물세례를 가리킵니다. 이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며 성령의 인치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되었음을 시사하는 표시입니다(1:13;2:5, 6). 한 주를 믿는 한 신앙인임을 고백하는 공적인 의식인 세례를 통해서 교회는 하나가 되었습니다(고전 12:13; 갈 3:27, 28). 그러므로 교회공동체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할 이유(3)


    성도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켜야하는 것은  하나님이 오직 한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 됨의 마지막 원리로 만유 가운데 충만하게 임재하시는 '한 하나님'에 대해 언급합니다. '한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이십니다. '만유의 아버지'는 인간을 구속하는 아버지로서의 측면을 강조하는 표현이나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로 보아 '우주적인 아버지'의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유 위에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고성과 초월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만유 가운데 계시다’는 것은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온 우주의 아버지이신 '한 하나님'은 교회의 통일성을 위한 근거이십니다. 성부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성도들이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을 힘써 지켜야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할 때마다 부끄럼 없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도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서로 다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부름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 서로 용납하고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기에 힘써야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게 베푸신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우리는 서로 용납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용납하게 될 때 우리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게 될 것입니다.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우리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교회공동체의 각 지체가 됩니다. 그러므로 누가 더 낫고 모자라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돕는 자로서 다른 지체를 돌아보며 연약한 자를 도와야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서로 돌아보고 돕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삽시다.

출처 : 센다바중앙교회
글쓴이 : kaporet 원글보기
메모 :